이주하는 인류/샘 밀러 지음/최정숙 옮김/미래의창/424쪽/1만 9000원
사실 인간은 어떤 포유류보다도 강력한 ‘이주 본능’을 탑재해 오랜 기간 삶의 터전을 옮겨 다녔다. 한곳에 ‘정주’(定住)하기 시작한 건 1만 2000년 전이고, 여권이 통용된 건 100여년쯤 됐다. 신간 ‘이주하는 인류’는 이런 이주의 역사를 살피면서 현대의 이주 논쟁이 얼마나 인종차별적이고 왜곡됐는지 들춘다.
유럽 이주사에 등장하는 영국 선박 ‘윈드러시’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1948년 영국 식민지였던 자메이카에서 처음으로 480명이 넘는 흑인을 본토로 데려온 이 배의 이름을 따 서인도제도의 초기 이주민들은 ‘윈드러시 세대’로 불렸다. 하지만 이 배의 원래 이름이 ‘몬테로사’였고, 1930년대 독일인 수만명을 남미로 실어 나른 이주민 수송선이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50년대 영국은 국외 이주자가 넘쳐났다. 10파운드를 내고 호주와 뉴질랜드로 이주한 영국(백)인 이민자 25만명을 가리키는 ‘텐 파운드폼’이란 표현이 등장할 정도였다. 프랑스 역시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온 백인 이주 노동자 규모가 한때 북아프리카 무슬림 이주자보다 더 컸다. 그럼에도 백인 이주의 역사는 잘 다뤄지지 않았다. 저자는 이 같은 상황을 백인의 ‘이주 기억상실증’으로 명명한다.
잊혀진 백인 이주의 역사 반대편에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유색인종 이주사가 있다. 19세기 중반 미국으로 밀려든 중국인 이주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대륙 횡단철도가 완성됐다. 하지만 철도 건설이 끝나자 중국인 노동자는 백인 이민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낙인찍혔고, 미국은 1882년 중국인 이민금지법을 만들며 박해했다.
책은 차이나타운을 기존 도시 주거지에서 중국 이민자들을 분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차별의 공간’으로 조명한다. 당시 영화와 TV 드라마에서는 변발 머리에 긴 수염을 가진 ‘푸 만추’라는 가공의 중국인 악당 시리즈가 인기를 끌며 대중에게 아시아 이민자를 잔인하고 교활한 이미지로 덧칠했다. 이주 노동력으로 전후 경제 재건을 한 유럽의 이민자들 역시 1973년 경제침체와 석유파동이 닥치자 증오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주 노동자의 모습에서 왜 백인이 사라지고 저개발국가의 가난하고 피부색 짙은 유색인종만 남게 됐는지를 노예무역과 황색 위협, 유대인, 남북전쟁 등에 얽힌 이야기로 풀어낸다.
앞으로 반세기 동안 이주 현상이 파괴적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책은 예고한다. 부자 나라들의 인구 노화로 노동력 부족을 메꾸려면 더 많은 이민자가 필요하다. 기후변화는 이주 인구를 극적으로 증가시킬 가능성이 크다. 유엔은 지구 온도가 1도 오르면 10억명이 이동하고, 30년간 환경 이주민 규모가 15억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인류의 대이동이 써 내려갈 역동적인 세계사는 지금부터일지 모른다.
2023-07-28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