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 연봉·각종 특혜에 ‘정피아’ 몰려
금융권 사외이사 선임에 정치권이 영향력을 휘두르는 ‘정치금융’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금융사 사외이사 자리가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높은 보수와 대우를 보장받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10일 금융권이 공시한 ‘지배구조 연차보고서’를 보면 시중은행 사외이사들은 본연의 역할인 견제와 감시 역할은 하지 않으면서 회의 한 번 참석으로 수백만원의 높은 보수를 챙기기도 했다.
시간당 가장 높은 보수는 하나은행의 전 사외이사가 챙겼다.
2013년 3월 하나은행 사외이사에 선임됐다가 작년 3월에 퇴임한 그는 작년 3개월간 근무로 받은 보수총액이 1천160만원에 달했다.
그가 지난해 간담회에 참석한 시간은 약 1시간 30분으로, 그가 받은 돈 1천160만원을 회의에 참석한 시간의 시급으로 환산하면 773만원이 넘는 셈이 된다.
KB금융지주와 국민은행 사외이사들은 금융권을 통틀어 가장 많은 보수를 챙겼다. 이들은 지난해 주 전산기 교체를 둘러싼 ‘KB 사태’를 수수방관하면서 갈등을 키웠고 이는 지주 회장과 은행장의 동반 퇴진을 불러왔다는 분석이 있다.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은 지난해 9천700만원의 연봉을 받아 국내 사외이사 중 최고 연봉 기록을 세웠으며, KB금융지주 이종천 사외이사는 8천700만원, 김영진·황건호 사외이사는 각각 8천600만원의 연봉을 받았다.
금융권 사외이사들은 보수뿐만 아니라 건강검진 등 기타 부대지원에서도 특혜를 누렸다.
삼성화재는 사외이사 본인(350만원)과 배우자(150만원)에게 500만원에 상당하는 건강검진을 지원해줬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액 건강검진이다.
메리츠화재(본인·배우자 포함 300만원), KB생명(본인·배우자 각 100만원), 동부화재(120만원), 코리안리(본인·배우자 각 120만원) 등 다른 보험사들도 건강검진 혜택을 제공했다.
사외이사들이 속한 단체가 상당액의 후원금을 받기도 했다.
이종천 KB금융 사외이사가 학회장을 맡은 한국회계학회는 사외이사로 선임된 2011년 이후 국민은행에서 8천만원의 기부금을 받는 등 KB 사외이사 관련 단체가 받은 돈은 무려 1억8천만원에 달했다.
신한금융의 자회사인 신한은행은 김기영 사외이사가 광운대 총장으로 있던 2012년에 광운학원에 2억원을 기부했다.
이런 혜택을 제공받으면서 사외이사들은 본연의 역할인 경영진에 대한 견제와 감시 역할은 없이 사실상 ‘거수기’에 불과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지배구조 연차보고서를 공개한 13개 은행의 지난해 이사회 회의에서 경영진 의사에 상반된 의견을 제시한 사례는 사실상 전무했다.
표면상으로는 국민은행 사외이사진 5명이 KB 사태로 내홍을 겪으면서 이건호 당시 행장 등 주 전산기 전환 관련 안건에서 격돌한 것이 유일한 사례로 꼽히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외이사들이 지주사의 입장을 그대로 대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금융사들은 사외이사들에게 고액의 연봉과 각종 혜택을 제공해 사외이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사외이사들은 이사회에서 ‘거수기’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이에 보답하는 구조가 정착된 셈이다.
금융권의 한 인사는 “금융사 사외이사직은 자리를 희망하는 후보 본인이 적극적으로 인맥을 동원해 추천을 끌어내는 경우가 많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전했다.
그는 “금융사 입장에서도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라는 식으로 정치권이 추천한 인사를 이사로 선임하고 각종 혜택을 제공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사외이사들이 이사회에서 경영진을 실질적으로 견제할 수 있도록 전문성 자격 요건을 더욱 강화하고, 정치권도 자정 노력을 통해 금융권 인사의 독립성을 확보해야 사외이사 제도가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문종진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는 “외국에서는 기업을 직접 운영해 본 경험이 있는 경영진 출신이 사외이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외이사 자격요건을 더욱 구체화하고 강화해 전문성이 없는 인사는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사외이사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20년이 지났는데 이사들이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여태 마련되지 않았다”며 “여전히 이어지는 관치와 변덕스러운 정치, 각종 규제들로 기업들이 허덕이는 환경부터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