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문화혁명·톈안먼 등 정치혼란 발생하면 경제추락
올해 2분기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간신히 7%를 나타내면서 중국 경제가 가라앉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불과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10% 대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던 중국 경제는 최근 4년새 크게 흔들리고 있다.
과거에 중국 경제는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 톈안먼(天安門) 사태 등을 겪으면서 수차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동시에 개혁개방 정책 속에 두자릿수 성장을 보이며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 ‘대약진’을 꿈꾸다 추락…성장률 -27%에 2천만명 굶어 죽어
6·25 전쟁 참전 이후 회복을 꾀하던 중국 경제는 1958년 대약진 운동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마오쩌둥(毛澤東) 전 국가주석은 당시 세계 경제 2위의 영국을 꺾겠다며 야심차게 급진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채택한다.
공산당 당국은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산업 전환을 꾀하며 국민에게 농기구를 녹여 철강을 만들도록 요구했다. 자연히 농업 생산량이 부족해졌다.
여기에 마오 전 주석이 벼 낱알을 쪼아 먹는 참새를 쥐, 파리, 모기와 함께 유해 생물로 지정하면서 수억만 마리의 참새가 순식간에 몰살당했다.
환경뉴스사이트 ‘마더 네이처 네트워크’에 따르면 중국 농민들은 참새가 날다가 지쳐서 떨어질 때까지 쫓는 식으로 집요하게 참새 사냥에 나섰다.
참새는 멸종하다시피 했지만 중국 당국이 간과한 점이 있었다.
1960년에 참새 개체 수가 급감하면서 천적이 사라지자 해충이 급격히 늘어나 농작물을 마구 먹어치웠다. 자연재해도 연달아 발생해 ‘대약진’ 대신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1958년까지만 해도 전년 대비 21.3%에 이르던 실질 GDP 성장률은 1959년 8.8%, 1960년에는 -0.3%까지 떨어졌다.
대기근으로 최소 2천만명이 굶어 죽은 뒤에야 마오 전 주석은 대약진 운동을 접었지만 그 여파는 1961년까지 미쳐 성장률이 무려 -27.3%를 기록했다.
중국 개혁 성향 잡지인 염황춘추(炎黃春秋)의 양지성(楊繼繩) 전 편집장은 가디언에 “공식 집계로는 굶어죽은 사람이 2천만명이지만 실제로는 3천600만명으로 추정한다”며 “이는 나가사키(長崎) 원자폭탄 투하로 숨진 인원의 450배, 1차 세계대전에서 숨진 인원보다 많다”라고 설명했다.
◇ 문화혁명, 마이너스 성장으로 시작해 마이너스로 끝나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거친 뒤 중국 경제는 다시 5년에 걸쳐 회복세를 보인다.
1964년과 1965년에는 경제 성장률이 각각 18.3%, 17%에 이르렀다.
하지만 마오 전 주석이 1966년부터 10여년에 걸쳐 현대판 분서갱유인 ‘문화혁명’을 주도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마오 전 주석은 낡은 사상과 풍속을 타파한다는 명분으로 극좌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당내 정적들을 숙청했다.
이 과정에서 류샤오치(劉少奇) 중국 전 국가주석이 ‘반(反) 마오쩌둥파의 수령’으로 몰려 숨지고 덩샤오핑(鄧小平)의 아들은 홍위병의 구타로 반신불수가 됐다.
홍위병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끌어내 길거리에서 ‘자아비판’을 시키는가 하면, 낡은 사상이라며 공자 상을 부수는 등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또 중국 당국은 지식청년층에게 “농촌으로 가서 배우라”며 하방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학생 2천만명이 반강제로 농촌에 내려갔다.
이 때에 현 중국 국가주석인 시진핑(習近平)도 산시성(陝西省) 옌안(延安)시 옌촨(延川)현에 있는 량자허(梁家河)촌 토굴집에서 7년을 보냈다.
이런 정치적 혼란은 경제에 타격을 줬다.
1966년 10.7%의 성장세를 보이던 경제는 1967년부터 곧장 마이너스로 추락했다. 1967년과 1968년의 GDP 성장률은 각각 -5.7%, -4.1%였다.
1976년 10월 마오 전 주석이 사망하면서 정권을 좌지우지하던 4인방은 추방되고 문화혁명도 막을 내렸다.
문화혁명 마지막 해인 1976년에도 GDP 성장률은 -1.6%로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다.
◇ 톈안먼 사태로 주춤했으나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1978년 마오 전 주석의 사망을 계기로 중국은 달라졌다.
덩샤오핑 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실권을 잡고 실용주의와 개혁개방 노선을 강력히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이 이 때에 나왔다.
당국이 농민에게 토지경작권을 주자 농산물 생산량이 급격히 늘었다. 또 민영기업을 허용하면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중국 경제는 11.7%(1978년) 성장했고 1980년대에도 10%를 넘나드는 성장률을 보였다. 1984년에는 성장률이 15.2%에 달해 1970년 이래 최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톈안먼 유혈진압 사태를 기점으로 중국의 성장세는 한풀 꺾였다.
1987년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에 미온 대응했다는 이유로 후야오방(胡耀邦) 전 공산당 총서기가 축출됐고 2년 뒤에 후 전 총서기가 숨지면서 톈안먼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중국 당국은 무기를 동원해 강력히 진압했다. 그 결과, 공식 집계로만 민간인 200여명이 숨지고 3천명이 다치는 등 대규모 인명 피해가 났다.
톈안먼 사태는 경제를 흔들었다. 1988년까지 11.3%에 달하던 성장률은 이듬해 4.1%, 1990년 3.8%로 주저앉았다.
중국은 이후 개방을 가속화하며 빠른 성장세를 보였고 2005년 미국, 일본, 독일 등의 뒤를 이어 세계 4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2008년에는 라인강의 기적을 이뤘던 독일을 제쳤고 2010년에는 일본마저 추월했다.
그러나 중국경제는 2012년 이래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달 중국 증시가 두 차례 폭락하고 이달 중국 정부가 위안화를 평가절하하면서 중국 경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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