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현의 사피엔스와 마음] 의식하지 않는 즉흥성의 필요

[하지현의 사피엔스와 마음] 의식하지 않는 즉흥성의 필요

입력 2018-12-24 17:26
수정 2018-12-25 03:22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이미지 확대
내년 초에 단행본을 낼 예정이다. 편집자가 초고를 수정해 보내 줬다. 반년 동안 써 내려간 글이 정리가 돼 도착했다. 앞에 쓴 내용이 뒤에 또 나오기도 하고, 호흡도 일정하지 않아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길고, 힘이 떨어져서 성급히 마무리를 하면서 어려워진 부분도 있었다. 이런 점이 전문가의 손을 거치면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팩트 체크를 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출력한 원고를 빨간 펜을 들고 내용을 검토하는 중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나 같으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부분이다. 기억은 안 나지만 분명히 나답지 않았다. 예를 들어 “끝이 나지 않고 간극은 선명해질 뿐이다”라는 문장인데, 초고를 찾아보니 “끝은 나지 않고 간극은 선명해질 뿐이다”라고 썼었다. 다른 곳에서도 ‘은’과 ‘이’가 미묘하게 바뀐 곳이 몇 군데 있었고, 하나같이 ‘어색한데?’라고 느낀 지점이었다. 예전에 한 소설가가 하루 종일 ‘은’과 ‘이’ 중 고민을 하느라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는 인터뷰를 보고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라고 비웃었는데, 남의 얘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현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하지현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나는 흔히 글쓰기를 밑준비는 오래 걸리지만, 한 번 워크를 잡으면 센 불에 단숨에 요리를 해내는 중국요리에 비유한다. 쓸 내용을 준비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한 번 자리를 잡고 앉으면 한 흐름에 최대한 많은 양을 써 내려가야 흐름도 좋아지고, 쓰기 전에는 생각 못했던 새로운 걸 써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글쓰기의 매력이라 생각한다. 기억력이나 판단력과는 다른 영역의 작동이다. 어떨 때에는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을 머리가 못 쫓아간다고 느껴질 정도의 무의식적 흐름을 경험한다. 이때 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의 안나 핀호는 다양한 경력의 피아니스트 39명이 즉흥연주를 할 때 fMRI를 찍어 뇌의 활동을 관찰했다. 즉흥연주를 한 경험이 많을수록 전두엽과 두정엽의 실행 능력을 다루는 부위의 활동은 줄어들고, 전두엽 전반의 연결성은 증가하는 것이 관찰됐다. 원숙한 연주자가 즉흥적 연주를 할 때에는 판단하고 계획해서 실행으로 옮기는 과정에 에너지를 덜 쓰고, 대신 뇌의 여러 영역의 연결성을 강화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창조적 시너지를 내는 데 집중했다는 것이다. 연주자들이 공연할 때 악보를 앞에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의식을 하지 않고 연주하는데, 악보를 신경쓰기 시작하는 순간 연주가 자연스럽지 않아지는 걸 바로 느낀다고 한다. 통제하고 계획하는 영역의 관장이 줄어야 즉흥의 영역이 자유로워져 새로움이 만들어진다.

나 역시 글을 쓸 때에는 조사나 부사의 세세한 차이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지 않고, 평소 느낌과 스타일대로 썼다. 그걸 편집자가 수정을 하면서 본인의 판단으로 몇 군데 교정을 본 것이 내게 어색함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부터는 글을 읽으면서 작은 디테일에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처음 글을 쓰는 단계가 아니고, 디테일까지도 신경을 써서 오류를 찾고 수정을 하는 시기였기에 더 도움이 되기는 했다.

글을 쓰건, 연주를 하건, 요리를 하건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신경을 쓰지 않고 즉흥적으로 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새로운 창조적 결과물을 내는 데 필요하다. 큰 덩어리만 잡아 놓고 나면 나머지는 충분히 익혀 완숙의 경지에 이른 테크닉으로 판단이나 실행의 통제 없이 거의 즉흥적으로 해나갈 수 있어야 프로의 경지라 할 수 있다. 결과물이 나온 다음에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는지 설명할 수 있지만, 만드는 동안은 무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아마와 프로의 차이는 그렇게 막 해버려도 될까 하는 망설임과 불안을 넘어서는 것에서 오지 않을까.

다만 즉흥성은 자칫 군더더기가 너무 많아진다는 단점은 있다. 좋은 고깃집에서는 들여온 고기에서 힘줄, 기름을 다 손질하고 난 뒤 손님상에 내놓는다. 불가피한 과정이다. 내 초고 원고도 20%는 사라져 버렸다. 살점이 베이는 느낌이라 차마 본인은 못할 일이지만 훨씬 정갈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새로운 것의 창작은 능숙한 기술에 의한 즉흥을 기반으로 하되 사후에 현실적 조정 과정을 수반해야 하는 것 같다.
2018-12-25 26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이번 '카카오톡 업데이트' 여러분은 만족한가요?
15년 만에 단행된 카카오톡 대규모 개편 이후 사용자들의 불만이 폭증하고 있다.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을 수 있는 구글 플레이스토어와 애플 앱스토어에는 “역대 최악의 업데이트”라는 혹평과 함께 별점 1점 리뷰가 줄줄이 올라왔고, 일부 이용자들은 업데이트를 강제로 되돌려야 한다며 항의하기도 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카카오는 개선안 카드를 꺼냈다. 이번 개편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1. 개편 전 버전이 더 낫다.
2. 개편된 버전이 좋다.
3. 적응되면 괜찮을 것 같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