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안보기록보존소 ‘CIA 내부 사례연구집’ 공개
지난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군정책을 백지화하는 데에는 미국 육군소속 한 대북정보분석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30일(현지시간) 밝혀졌다.이 같은 사실은 미국 비영리기관인 ‘국가안보기록보존소’(National Security Archive)가 중앙정보국(CIA)에 기밀해제를 요청해 최근 공개한 내부 사례연구집을 통해 드러났다.
이 사례연구집은 1996년 당시 CIA의 후원을 받고 있던 미국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 소속 조 우드워드가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1976년 6월23일 대선 경선후보였던 카터는 주한미군 철군을 대선공약으로 발표하고 취임직후인 1월26일 ‘대통령 검토각서’(Presidential Review Memorandum) 13호를 통해 각 군에 철군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 같은 결정에 육군을 중심으로 미군 수뇌부 내에서 반대의견이 제기됐으나 카터 전 대통령의 공약이행 의지가 워낙 강했던 데다 의회 내에 팽배한 반한여론 탓에 이렇다 할 탄력을 받지 못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정보기관의 평가가 남·북한의 군사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어 어느 한쪽이 성공적으로 공격을 감행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는 1970년 작성된 북한 군사력 정보평가에 매년 성장률을 더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낡은 자료’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철군론을 뒤엎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때 육군 산하 싱크탱크인 특별조사대 소속 존 암스트롱이라는 대북 정보담당관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던 대북 정보업무에 2년여간 몰두해왔던 암스트롱은 1976년 9월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내정됐던 존 W 베시 2세 장군에게 전혀 새로운 내용의 북한 군사력 정보를 제공했다.
위성사진을 판독한 결과, 북한군이 보유한 탱크 수가 당초 알려진 것보다 80% 이상 많았고 비무장지대 100㎞ 이내에 270개의 탱크와 100개의 병력수송 장갑차를 보유한 하나의 완벽한 탱크사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카터 행정부로 정권이 이양되던 1977년 1월 암스트롱은 베시 사령관에게 다시 브리핑을 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미군 수뇌부와 정보기관들에게 전파됐다.
부랴부랴 북한 군사력 재평가에 들어간 미국 정보기관들은 일단 북한군의 탱크 수가 남한의 1.5배, 포대와 장갑차 수가 남한의 1.9배에 달하고 다만 지상군 병력 규모 면에서 남한이(56만명)이 북한(45만명)을 앞선다는 식으로 기존 평가를 수정하고 이를 정권인수팀에 전달했다.
그러나 카터 행정부는 이를 무시했다. 포드 행정부 말기 중앙정보국장이었던 조지 H.W 부시까지 나서 카터 대통령에게 “철군은 잘못된 정보판단에 근거한 것”이라는 메모를 보냈지만 반응이 없었다. 급기야 정보기관들은 대통령 검토각서 부속서에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카터 대통령은 이에 아랑곳없이 같은 해 3월 주한미군을 4∼5년 안에 단계적으로 철군하고 전술핵무기도 철수한다는 계획을 공식 발표하는 등 ‘마이웨이’를 고수했다. 당시 존 싱글러브 미8군 참모장이 언론 인터뷰 기사에서 “주한미군을 철군하면 반드시 전쟁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가 곧바로 카터 대통령에게 소환돼 좌천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누구도 카터 대통령의 소신을 꺾기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 암스트롱은 더욱 집요하게 북한 군사력 정보수집에 몰입했고, 이듬해인 1978년 5월 북한 지상군 병력규모와 관련해 완전히 새로운 정보평가를 담은 보고서를 정보기관들과 워싱턴 전문가 그룹에 제시했다. 그동안 북한군 편제표에 없었던 3개 사단과 1개의 여단이 새롭게 확인됐다는 것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것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지상군 숫자만큼은 남한이 우월하다고 판단했던 정보기관들로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스탠스필드 터너 중앙정보국장은 휴가 중이던 암스트롱을 긴급 호출했다. 상세한 브리핑을 받은 터너 국장은 바로 당일 저녁 한 파티에서 해럴드 브라운 국방장관을 만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전했다. 깜짝 놀란 브라운 장관은 당시 유진 타이 국방정보국(DIA) 국장에게 암스트롱의 대북 정보를 왜 사전 보고하지 않았느냐고 질책했다.
미국 정부 내에는 즉각 암스트롱을 중심으로 대북 정보전문가 35명으로 구성된 특별팀이 꾸려졌다. 자기중심적이고 ‘쇼맨십’이 강한 암스트롱과 관료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DIA가 충돌과 알력을 빚기도 했으나 우여곡절을 거쳐 같은 해 10월 충격적인 ‘암스트롱 보고서’가 나왔다. 북한 지상군 병력규모가 기존 45만명이 아니라 55만∼65만명에 달하고 지상군 사단의 숫자도 28개가 아니라 41개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즉각 터너 국장을 통해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에게 보고됐다. 당시 백악관 참모그룹 중 유일하게 철군을 지지했던 브레진스키는 당시 터너 국장이 “심각한 파장을 낳을 심각한 보고서”를 들고왔다고 회고했다.
암스트롱 보고서는 1979년 1월 ‘아미 타임스’(The Army Times)라는 미국 국방전문지에 누출됐고 주류언론은 이를 삽시간에 확대 재생산했다. 주한미군 철군론을 뒷받침해온 근거가 무너지면서 여론은 철군반대 쪽으로 급속히 기울기 시작했다.
’우군’인 민주당 내에서조차 강력한 반대가 제기되면서 카터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됐고, 급기야 1979년 2월9일 상원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철군 보류결정을 공식 발표하게 됐다고 사례연구집은 밝혔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