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정보당국, ‘미신고’ 기지들 이미 파악”…전문가들도 “北, 약속어긴 건 아냐”
미국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가 12일(현지시간) 북한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약 20곳의 ‘미신고(undeclared ) 미사일 운용 기지’ 중 13곳의 위치를 확인했다고 밝히고 이 가운데 삭간몰 미사일 기지를 ‘공개’하면서 미국 언론과 조야가 그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특히 시기적으로 북미 간 교착 국면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가운데 이뤄진 것이어서 향후 북미 대화에 영향을 줄지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8일로 예정됐던 북미간 뉴욕 고위급 회담이 연기되고 제재를 둘러싼 기 싸움이 가열되는 등 답보 상태가 이어지는 상황이어서다.
앞서 ‘빈손 논란’에 휘말렸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지난 7월 초 3차 방북 이후 북미 간 신경전 가열로 한동안 답답한 흐름이 이어졌을 때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 바 있다. 7월 말 워싱턴포스트(WP)가 익명의 정보당국 관계자를 인용, 북한이 평양 외곽에 있는 산음동의 한 대형 무기공장에서 액체연료를 쓰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을 제조 중인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포착됐다고 보도하는 등 그 무렵 북한의 핵·미사일 은폐설이 정보당국발로 잇따라 불거졌다.
미국 언론들은 CSIS의 이번 보고서에 대해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더는 핵 위협은 없고 진전은 계속되고 있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공언’과 달리 현재 직면한 북한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미 정보당국도 이러한 ‘미신고’ 내지 숨겨진 시설들의 ‘존재’를 상당 부분 파악해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WP는 ‘새롭게 드러난 북한의 미사일 기지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 간 정상회담의 값어치에 의구심을 드리운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번 보고서는 북한이 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긴 했어도 핵 시설은 전혀 해체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근거로, 실제 북한은 오히려 비축량을 더 늘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보도했다.
다만 이번 보고서에서 공개된 미사일 기지의 존재를 북한이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의 합의를 어긴 증거로 볼 수는 없다고 WP와 전문가들은 판단했다. 아직 북미 사이에서 구체적인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이상 북한이 이러한 미사일 기지를 자발적으로 신고하거나 폐기할 의무는 없다는 점에서다.
미들버리 국제학연구소 동아시아 비확산프로그램의 제프리 루이스 소장은 “김정은은 어떤 약속도 깨지 않았다”며 김 위원장이 북미 간 해빙국면이 시작하기 전인 올 신년사에서 ‘핵탄두와 탄도로켓 대량 생산 및 실전 배치’를 언급한 점을 들어 “오히려 김정은은 핵무기를 대량생산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결코 핵무기를 버리겠다고 제안한 바가 없다. 북한은 언젠가 그와 같은 결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한 과정의 출발점을 제안했을 뿐”이라며 “김정은이 트럼프를 기만한 게 아니라 트럼프가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문가들은 이들 (공개되지 않은 미사일 운용) 장소에 대해 수년간 알아온 만큼 아직도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비확산 전문가인 비핀 나랑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교수도 미 인터넷매체 ‘복스’에 “이것들은 대부분 단거리(미사일) 운용 기지로, (핵)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한 김정은이 이 기지들을 없앤다면 바보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북한이 무기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미사일 기지의 경우도 북한이 미국을 속인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김두연 신(新)미국안보센터(CNAS) 한국 담당 연구원은 WP에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어떤 약속도 깨지 않았다. 왜냐면 아직 워싱턴과 어떠한 핵합의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논평했다.
사실 이러한 ‘미신고’ 시설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인정하진 않았지만, 미 정보기관들에는 오랫동안 알려진 것이라고 CNN 방송은 지적했다.
CNN에 따르면 중앙정보국(CIA)은 CSIS 보고서를 통해 공개된 위성사진들에 대한 언급을 거부했지만, 당국자들은 북한이 숨겨진 미신고 장소들을 활용해 미사일 기술 및 핵 프로그램을 계속 향상해나갈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해왔다.
그러면서 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산 밑 지하 벙커 안에 이동형 미사일 발사대를 포함, 핵 역량의 상당 부분을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오랫동안 판단해왔다고 이 방송은 덧붙였다.
그럼에도 미사일 기지의 존재를 부각한 CSIS 보고서와 미 주요 매체들의 관련 보도는 미국 내에서 북한과의 핵 협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조성해 북미 대화를 꼬이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런 가운데 고위급 회담 개최 등 북미간 돌파구가 조기에 마련되지 않을 경우 자칫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에 대한 미 조야의 의구심 내지 회의론이 확산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이는 “핵실험만 없다면 시간이 얼마든 걸려도 상관없다. 서두를 게 없다”며 속도 조절론을 펴며 전례 없는 ‘톱다운’ 협상을 펴고 있는 트럼프식 북미대화 방식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론과도 연결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자칫 내년 초로 예정된 2차 북미정상회담 추진의 동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특히 11·6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이 이런 보고서 내용 등을 부각시키며 견제의 고삐를 더욱 강화할 공산도 없지 않아 보인다.
척 헤이글 전 국방부 장관은 CNN에 “(비핵화에 대한 진전이 이뤄졌다는) 트럼프의 언급들이 거짓말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며 “북한은 비핵화를 위해 어떤 단계를 밟을지 그 계획을 보여주는 어떠한 문서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WP는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신고하거나 숨겨놓은 시설들을 보유하고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으며 이 때문에 검증과 사찰 문제가 북미간 실무협상의 핵심 내용으로 부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이번 보고서의 내용은 그만큼 ‘검증 가능한 신고’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북미간 교착 상태가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전문가의 견해를 소개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이날 논설에서 북한이 핵연료를 계속 생산하고 있다는 폼페이오 장관의 지난 7월 답변과 이날 공개된 미사일 기지 사진이 “폼페이오 장관과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의 외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해 중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했다.
복스도 이날 보고서가 북미 대화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으며, 북한이 여전히 미국과 아시아 우방들에 주된 위협이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평가했다.
또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이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협상에 관해서도 조사할 뜻을 밝히고 있어 CSIS 보고서가 민주당의 공세 근거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미국 입장에서는 북한을 압박하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와 함께 이미 미 당국도 ‘미신고’ 시설들에 대한 존재를 몰랐던 것이 아닌 만큼, 새삼스레 협상의 변수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