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졸학력, 구로공단.청계천서 공장생활..프랑스유학서 영화 접해1996년 ‘악어’로 데뷔..16년만에 베니스 황금사자상 차지
제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김기덕(52) 감독은 비주류 아웃사이더로 출발해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최고상을 거머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영화를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이 없고 거친 환경 속에서 잡초처럼 살아온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영화 같기도 하다.
미술적인 재능을 독학으로 깨우치는 등 타고난 예술성으로 자신의 삶에서 깨달은 인간성의 극단적 측면을 영화에 날 것 그대로 표현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고유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1960년 경상북도 봉화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일반 고등학교가 아니라 공식 학력으로 인정되지 않은 농업학교에 갔고 결국 최종 학력은 중졸이 됐다. 학교 졸업 뒤 취업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공장에서 일하며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한국 산업화의 명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구로공단과 청계천은 김 감독의 어두웠던 젊은 시절이 녹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김기덕은 ‘피에타’의 무대가 된 청계천에서 15살때부터 공장 생활을 했다고 밝혔으며 이후 구로공단에서도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2001년 당시 막 오픈한 멀티플렉스체인 CGV구로에서 ‘나쁜 남자’로 관객과의 대화를 하면서 “감독 데뷔 전 노동자로 일했던 구로공단이 있던 자리에 생긴 극장에서 내 영화를 상영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자신을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고 제대 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모색한다.
대학로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을 하기도 한 그는 프랑스 남부의 한 해변에서 초상화 그리기로 생계를 유지하며 본격적으로 유화에 도전하는 등 미술가로서의 재능을 발전시킨다.
당시 프랑스에서 32세의 나이에 처음 봤다는 영화 두 편 ‘양들의 침묵’과 ‘퐁뇌프의 연인들’은 이후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한국에 돌아와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1995년 ‘무단횡단’이라는 시나리오로 영화진흥위원회의 공모에 당선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 첫 영화 ‘악어’를 연출, 감독으로 데뷔한다. 영화를 처음 본 지 불과 4년 만의 일이다.
사회 밑바닥의 음울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극단적인 폭력과 성폭행, 엽기적인 행각, 변태적인 심리 등을 자주 그린 그의 영화들은 평단의 논쟁을 불러왔지만, 기존의 영화 작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인장을 강렬하게 새긴 작품들은 국내외에서 점점 주목받기 시작한다.
1998년 세 번째 작품 ‘파란 대문’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파노라마 부문 개막작으로 상영됐으며 다음 작품 ‘섬’이 2000년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고 미국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상을 받았다. 같은 해 대학로에서 불과 3시간 만에 찍었다는 ‘실제상황’도 모스크바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다.
이어 2001년 ‘수취인불명’으로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에, 2001년에는 ‘나쁜 남자’로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다. ‘나쁜 남자’는 국내에서 7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면에서도 처음으로 성공한다.
’나쁜남자’의 성공 이듬해 그는 톱스타 장동건과 손잡고 ‘해안선’을 작업하면서 또다시 화제를 모았다.
김 감독 스스로 밝혔듯 김 감독의 명성이 쌓이면서 국내외 스타급 배우들이 그와 작업하기 위해 먼저 연락해오기 시작했다.
그는 “장동건, 이나영, 장첸, 오다기리 죠 등 함께 한 거의 대부분의 배우들이 먼저 같이 하자고 제의를 한 것”이라며 “최근에는 미국 배우 윌렘 데포도 연락이 왔는데 아직 맞는 캐릭터를 못 찾아 대기 중”이라며 밝히기도 했다.
또 “해외 영화제에 가면 배우들이 호텔방에 메시지를 넣고 간다. 나중에 잊지 않지 않고 캐스팅 단계에 떠올린다”고 공개했다.
그는 2003년 연출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는 국내 대종상과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거머쥐며 국내에서도 드디어 작가주의 감독으로 인정받는다.
이어 2004년 ‘사마리아’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빈집’으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한 해에 세계 3대 영화제에서 2관왕을 차지한 그는 세계적인 거장 감독의 반열에 오른다.
2005년에는 ‘활’로 칸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고 2007년에는 ‘숨’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다.
하지만 해외에서 각광받는 김 감독도 국내에서는 늘 ‘비상업 예술영화’의 비애를 안고 살아야했다.
2005년 극장을 잡지 못해 ‘활’을 단관 개봉 형식으로 관객에게 선보여야 했던 김 감독은 이듬해 ‘시간’은 아예 국내 개봉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가 막판에 배급사가 나타나 극적으로 개봉을 하게됐다.
당시 그는 예술영화감독의 비애를 공개적으로 토로했고, 때마침 스크린을 싹쓸이하며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에 올라선 ‘괴물’을 거론하며 “’괴물’은 한국영화 수준과 한국관객의 수준이 만난 영화”라는 등의 독설을 퍼붓는 등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랬던 김기덕은 2008년 본인이 시나리오를 쓰고 제자인 장훈 감독에게 연출을 맡긴 ‘영화는 영화다’가 13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반전을 맞는 듯 했다. 김기덕 영화 중 최고 흥행 기록이다.
하지만 이후 장 감독이 대형 투자배급사와 손잡으며 자신을 떠나고, 같은 해 ‘비몽’ 촬영 과정에서 주연 배우 이나영이 죽을 위험을 넘기는 일을 겪은 뒤 김 감독은 농촌의 오두막에 칩거,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3년여간의 은둔 생활 중 인간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영화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다큐 형식으로 담은 영화 ‘아리랑’은 2011년 칸영화제에 출품돼 ‘주목할 만한 시선’ 상을 받는다. 베를린, 베니스에 이어 칸에서까지 수상하며 그는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한 최초의 한국 감독으로 기록됐다.
이 수상으로 그는 은둔 생활을 끝내고 감독으로서의 부활을 화려하게 알린다. 곧이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제자인 전재홍 감독에게 메가폰을 맡긴 ‘풍산개’가 화제를 모으며 국내에서 71만 관객을 동원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창작열을 회복한 그는 지난 겨울 자본주의의 황폐함과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구원 가능성을 묻는 영화 ‘피에타’를 찍었고 이 영화로 마침내 베니스영화제를 뒤흔들며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피에타’는 김기덕의 18번째 작품. 그는 이 영화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은 첫 번째 한국 감독으로 이름을 남기며 20년도 채 안 되는 영화인생에 정점을 찍게 됐다.
김 감독은 수상에 앞서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피에타’는 장편 극영화로는 3년 만의 작품이다. 이것은 나에게 새로운 출발이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