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오피스텔로, 고시원으로 흔적 감춰… 가난한 젊은이들이 붐비던 추억의 짜장면집·막걸리집도 함께 사라져… 낙원상가 옆 허름한 국밥집에선 추억 한사발
사라 본이 부른 ‘러버스 콘체르토’는 영화 ‘접속’의 엔딩곡이었다. 서로 다른 사랑의 생채기를 가슴에 품고 있던 동현(한석규)과 수현(전도연)은 PC통신으로 만난다. 얼굴도 모른 채 요즘 말로 ‘썸’을 탄다. ‘접속 신드롬’이 일었고, OST 판매 열풍이 일었다. 영화 도입부에 동현과 수현이 각자 영화를 보고 나서는 곳도, 영화 마지막에 두 사람이 극적으로 만나고 ‘러버스 콘체르토’가 흐르는 곳도 모두 한 장소다. 서울 종로3가 피카디리극장 앞이었다. 삐삐가 있고, 엇갈린 약속을 확인하려는 공중전화기 앞의 긴 줄이 있고, 푸른 모니터 화면 위에 깜빡이는 커서를 따라 흐르는 여운이 있던 시절인, 1997년 어느 가을날의 풍경이다.길 맞은편에 있던 단성사는 가림막 안쪽에서 막바지 건물공사가 한창이다. 한국 최초의 영화관 단성사는 떠나는 마지막 길조차 순탄하지 못했다. 8년 전 경영난으로 부도가 났고, 극장으로서의 용도가 폐기됐다. 2012년 법원경매에 나온 뒤 세 번의 유찰 끝에 지난 3월 575억원에 낙찰됐다. 감정가의 59.7%였다. 물론 그 감정가에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 ‘겨울여자’(1977),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등 한국 영화사에 쓰여진 각종 기록을 품은 108년 동안의 유장한 역사도, 자기 얼굴 잘 그려달라고 배우로부터 부탁받기도 했던 ‘영화 간판쟁이’의 으쓱거림도, 컴컴한 극장 뒷줄에서 남몰래 입 맞춘 청춘남녀의 순정함도, 기다랗게 늘어선 줄 사이를 오가며 암표를 팔고 쥐포를 팔아 생계를 이어야 했던 가장의 위대함도, 모두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건물 1만 3642㎡(지하 4층~지상 10층), 인근 토지 4개 필지(2009.1㎡)’만으로 가치가 매겨졌을 따름이다. 새 주인은 이곳을 영화와 관계없는 오피스 건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하니 단성사의 흔적은 이제 영영 사라지게 됐다.
‘잡식성 시네필’을 자처하는 시인 김영탁(56)은 “1970~1980년대 당시 젊고 가난한 연인들은 단성사, 피카디리 등에서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람이 몰려들기 전 서둘러 물만두집으로 옮겨 짜장면 한 그릇과 물만두를 나눠 먹고 하염없이 종로, 을지로를 걷는 것으로 데이트 삼았다”고 지나간 시절을 회상했다. 물만두집 ‘신성원’은 이미 없어졌다. 그는 “단성사, 스카라, 대한극장, 국도, 명보 등 극장 앞에는 나름 유명한 짜장면집이 늘 있었다”면서 “영화의 시대는 짜장면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 몇몇 집을 제외하고 많이들 없어졌다”고 말했다. 김영탁의 기억 속에 들어 있던 가난한 젊은이들이 찾곤 하던 피맛길의 고갈비 막걸리집이나, 작품성 있는 영화를 상영하던 종로2가 코아아트홀, 퇴계로 스카라극장 앞 짜장면집도 모두 극장과 함께 사라졌다. 어렴풋하게 남은 추억만 종로 언저리를 맴돌 따름이다.
서성이는 발걸음은 종로 뒷길인 피맛길을 따라 탑골공원 후문 쪽을 향했다. 시인 기형도(1960~1989)가 만 스물 아홉이 되기 일주일 전 그날 밤, 마지막 가쁜 숨을 토해냈던 심야극장이 있던 곳이다. 개봉 기한이 지난 영화 2편을 동시상영하는 재개봉관 파고다극장이었다. 어떤 이들은 기형도가 본 마지막 영화가 ‘뽕2’라는 사실에 적이 놀랐고, 또 어떤 이들은 그도 자기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내심 안도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가거라 짧았던 밤들아’로 시작하는 시편 ‘빈 집’은 그의 불안과 절망을 드러냈고, 생의 마지막에 대한 문학적 암시를 담았다.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실려 숱한 문청들을 불면의 밤으로 내몰았다. 또 유하, 박몽구 등 뭇 시인들은 요절한 젊은 시인과 파고다극장을 자신들의 시에 담아 다시 살려내보려 애쓰기도 했다.
파고다극장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였지만 고시원으로 변신했다. 앞쪽에 즐비한 포장마차는 낮술을 마시는 노인들로 북적였다. 21세기 화려함의 흔적도, 치기어린 젊음도 없는, 시간을 붙잡고 멈춰진 공간처럼 남아 있다. 탑골공원 담벼락을 끼고 ‘국밥 2000원’, ‘닭곰탕 3000원’, ‘이발 3500원’ 등속의 삐뚤빼뚤한 손글씨 메뉴판을 내건 가게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골목을 지나니 낙원상가다. 허리우드극장이 있는 곳이다.
낙원상가 4층에 있는 허리우드 극장은 실버영화관으로 탈바꿈했다. 55세 이상이면 2000원에 영화를 볼 수 있다. 1956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은 ‘트래피즈’를 상영하는 중이다. 슬쩍 문을 열고 훑어보니 전체 300석 중 3분의 2 가까이 들어찼다. 그 옆 ‘명량’을 상영하는 낭만영화관에선 절반 이상 객석을 메운 관객들이 막바지로 치닫는 명량대첩 전투장면에 흠뻑 빠져 있었다.
2009년부터 실버영화관을 운영하고 있는 김은주(41) 허리우드클래식 대표는 자부심과 어려움을 함께 털어놓았다. 허리우드클래식은 90명에 이르는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회적기업이기도 하다. 그는 “고전영화로서 화면의 질은 아마 국내에서 가장 좋다고 자부한다. 극장 좌석 높이를 감안해 자막 위치도 조금 위로 올리고, 어르신들을 배려해 자막의 글자 크기도 크게 입혔다”고 자랑하면서도 “객석을 가득 메우더라도 운영상 적자는 불가피해 사재를 털고 있고, 서울시와 기업의 후원금으로 메우고 있다”고 말했다.
실버영화관에서 내려오니 커다란 솥단지에서 흰 김이 모락거리는 국밥집들이 즐비하다. 시인 황지우(63)가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시 ‘거룩한 식사’ 중)라고 노래했던 순댓국집들이다. 늦은 오후, 중씰한 대여섯명의 남자들이 벽을 마주한 채 가난하고도 바쁜 숟가락질에 한창이다. 허우적거리며 추억을 더듬던 발걸음이 문득 멈추고, 이내 시장기가 몰려온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2015-05-02 1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