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수전 올리언 지음/박우정 옮김/글항아리/488쪽/1만 9000원
서울 송파구 신천유수지 창고를 리모델링한 공공 헌책방 ‘서울책보고’에서 한 시민들이 헌책으로 만든 조형물을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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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은 맹렬히 타올랐고, 책 40만권을 재로 만든 뒤 7시간 38분 만에 진화됐다. 훼손된 책은 무려 70만권. 당시 일반도서관 15개의 소장 도서를 전부 합친 것과 맞먹는 양의 손실을 입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공공도서관 화재였다. 그런데 이 참사는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묻혔다. 그리고 8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뒤 LA도서관은 다시 문을 열었다.
알려진 팩트는 대략 여기까지였다. 도서관 화재사건은 시나브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고 역사 속으로 조용히 묻히는 듯했다. 하지만 새 책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의 저자는 달랐다. 지역 신문에 실린 1단짜리 기사를 단초로, 이면에 감춰진 거대한 비밀들을 곧잘 캐냈던 저자는 이번엔 LA도서관 화재사건의 이면에 포커스를 맞췄다.
책은 잿더미 위에서 과거를 복원해 내고 있다. 도서관 화재와 연관된 사건들을 씨줄로, 도서관과 관련된 이들의 삶과 인생을 날줄로 도서관 연대기를 구축해 간다.
저자는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사건에 매달렸다. 도서관 화재사건에 연관된 인물들이라면 ‘흥신소 직원’처럼 어떻게든 찾아가 인터뷰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인물들의 도서관 속 삶은 책의 큰 줄기 중 하나가 됐다.
LA 공공도서관은 1873년에 문을 열었다. 당시엔 회비가 비싸 부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고 여성들은 ‘숙녀용 열람실’에서 선별된 잡지만 읽을 수 있었다. 이 같은 봉건적 도서관 문화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서 메리 포이, 다양한 책을 도서관에 들여놓으려다 “악마와 바람이 났다”는 구설수에 오른 테사 켈소, 여성이라는 이유로 해고 소송에 휘말린 도서관장 메리 존스, 인간 백과사전이라 불렸던 C J K 존스, 비범한 재능을 갖췄지만 과학 서적에 독극물 경고 도장을 찍는 등 돌출행동을 일삼았던 찰스 러미스 등이 과거에서 소환돼 도서관 연대기를 이어 간다.
복구 과정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가 꼬박 사흘 동안 불에 그슬리고 물에 젖은 70여만권을 손에서 손으로 전달해 냉동고로 옮겼다. 저자는 이 순간을 “LA 시민들로 살아 있는 도서관을 이룬 것 같았다”고 했다. 영하 56도의 창고에서 2년을 보낸 책들은 해동, 건조, 소독, 보수 등의 과정을 거쳐 다시 제본됐다. 그리고 1993년 10월 3일, LA 공공도서관에서는 책 200여만권을 꽂는 ‘책 꽂기 파티’가 열렸고 5만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도서관의 부활을 축하했다. 공교롭게도 그해 4월, 동성애자였던 해리 피크는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저자가 말하려는 건 결국 도서관은 한낱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수많은 책들과 함께 늙어 가며 수많은 기억을 만들고, 공유하고, 저장하는 유기체, 그게 바로 도서관이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2019-10-11 3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