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의 산책] 초록 소파

[나희덕의 산책] 초록 소파

입력 2012-08-26 00:00
수정 2012-08-2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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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기다리는 동안 주변의 골목을 산책했다. 집마다 특색 있게 가꾸어놓은 정원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사람이 살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방치된 집을 발견했는데,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고 유리창은 깨지거나 희뿌연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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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기계와 쓰레기통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정원에서 유난히 내 눈길을 끈 것은 낡은 소파였다. 거실에 있어야 할 소파가 정원에 나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1인용 소파는 한때 주인이 정원에 앉아 있곤 하던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을 잃은 초록 소파는 햇살과 빗물로 빛이 바랠 대로 바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 소파가 낡거나 썩어간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초록 소파 구석구석에서 자라고 있는 풀 때문이었다. 인공의 초록 속에 돋아난 또 다른 초록. 바람이 불 때마다 풀이 가볍게 흔들리고, 어디선가 하얀 꽃잎이 날아와 앉기도 했다. 새똥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소파는 사람 대신 새들을 앉혔음이 분명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정말 새 한 마리가 소파에 내려앉는다.

그렇게 순간순간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느라 나는 쉽게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바라볼수록 소파는 버려진 사물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키우는 숭고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겨드랑이에 풀을 키우고 넓은 등에는 새들을 업어 키우며 그는 이 폐허의 가장 노릇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풀이 자신의 몸을 온전히 덮을 때까지 그는 거기에 묵묵히 남아 있을 것이다.

자동차를 찾으러 발길을 돌리면서 나는 초록 소파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붉은 소파’와 함께 30년 동안 세계를 여행했던 사진작가 호르스트 바커바르트처럼, 초록 소파에게도 아름다운 들판과 바닷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더 많은 새와 사람들을 그 위에 앉게 하고 싶었다.

나희덕_시 쓰는 문학집배원. 조선대학교 교수이자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때론 모호함과 불편함이 좋은 시가 거느린 그림자라고 믿습니다.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어두워진다는 것> 등의 시집을 냈습니다.



*이번 호부터 ‘산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현재 영국에서 안식년 중인 필자가 영국을 산책하며 만나고 스치는 것들, 그 감미롭고 서정적인 일상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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