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일 70년] <3> 日강제징용 피해 유족들의 고통

[격동의 한·일 70년] <3> 日강제징용 피해 유족들의 고통

입력 2015-01-15 18:06
수정 2015-01-17 11:34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강제동원 아버지 흔적 50년 만에 야스쿠니서 찾아… 무관심 정부 더 화나”

“제 아비 잡아먹은 년”이라는 말은 아무리 아들 잃은 어미가 내뱉었다고 하더라도 여덟 살 먹은 여자아이가 친할머니한테 듣기엔 너무 가혹한 저주였다. 그 한마디는 60년이 넘은 지금도 예리한 칼날로 이희자(72)씨의 가슴을 후벼 판다. 아버지가 강제징용됐을 때 이씨는 생후 13개월밖에 안된 갓난아기였다. 지금도 이씨는 아버지 얼굴조차 모른다. 1989년이 돼서야 강제동원 피해자 단체에 참여하면서 바닷가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아버지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그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이자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의 산증인이 됐다.

이미지 확대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지난 1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강제징용 이후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에 뛰어들게 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지난 1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강제징용 이후 행방불명된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 운동에 뛰어들게 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이 대표는 강화도가 고향이다. 아버지 이사현씨는 23세이던 1944년 강제징용됐다. 편지는 딱 한 번 왔다. 외삼촌이 기억하는 편지 내용은 이랬다. ‘전쟁 중이고 부대가 계속 이동 중이다. 이 편지 발신지로 답장을 해도 소용이 없다. 나중에 다시 편지하면 그곳으로 답장을 보내라.’ 발신지는 중국이었다.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죽었다는 통지서가 없으니 말 그대로 행방불명이었다. 어머니와 이 대표 모두 6·25전쟁이 나던 1950년까지도 아버지가 돌아올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버지만 돌아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징용 가던 날 어머니는 친정에 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나를 안고 처가로 가서 어머니를 2년만 보살펴 달라며 맡겼다고 합니다. 시댁살이 고생할까 봐, 딸이라고 구박받을까 봐 그랬다고 해요. 그때부터 외갓집에서 살았습니다.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상황이 완전히 달랐겠죠. 어머니는 친정에 갈 필요도 없었고 나는 대를 이을 맏이라고 할머니한테 사랑받으며 컸겠죠. 전쟁이 나고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다는 희망을 버리게 되니까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친가에 가서 돌아와서 살게 해 달라고 하니 할머니가 막 욕을 하더라고요. 아버지와 지내던 방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났죠.”

이 대표는 나중에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들을 많이 만나면서 자기만 그런 말을 들었던 게 아니란 걸 알았다고 한다. 남편을 잃었으면 ‘제 서방 잡아먹은 년’이란 소릴 듣고, 아버지를 잃었으면 ‘제 아비 잡아먹은 년’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대표가 나중에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할머니를 다시 찾아갔을 때도 할머니는 입학원서에 보호자 도장을 찍어 주길 거부했다. 결국 이 대표는 최종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 됐다.

안으로만 삭이던 상처를 이 대표는 강제동원 희생자 운동을 시작하면서 서서히 치유할 수 있었다. 1989년 7월부터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활동에 참여했다. 당시엔 운동을 한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자식으로서 아버지 흔적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넘겨준 사망자명부를 뒤지고 뒤지다 1992년 드디어 아버지 이름과 주소지 기록을 찾았을 때의 기쁨을 이 대표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명부에는 ‘중국 광시성 전현 181부대 101중대 181병동에서 1945년 6월 11일 전병사(戰病死)’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1997년 두 번째 기록을 찾았다. 아버지 위패는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었다. “억울하고 분해서 온몸의 피가 멎는 느낌이었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죠. 어머니가 할머니한테 들었던 험한 말이 떠올랐어요.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하면서 유족들에겐 알리지도 않았다는 게 기가 막혔습니다.” 다른 유족들과 함께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이 일은 이 대표가 더 열심히 강제동원 희생자 운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이 대표로선 평생 이뤄야 할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대표는 오랫동안 일본을 상대했지만 일본에 대한 감정은 복합적이다. 한국보다 더 열심히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위한 운동을 하는 일본인도 많이 만났고 그들에게 받은 도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양심 있는 일본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나 스스로 상처를 조금씩 치유한다”고 표현했다. 가령 ‘재판지원회’라는 단체 회원들은 한국에서 일본을 방문할 때 안내와 통역은 물론 숙식까지 도맡아 처리해 주면서도 자신들이 한국에 올 때는 무조건 모든 비용을 자비로 처리한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 정부한테 더 화가 납니다.” 이 대표는 “한·일협정 때 받은 돈으로 경제발전했는데, 강제동원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시설이나 이들이 겪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시설 마련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에 대해 날 선 비판을 쏟아 냈다. 그는 “소송에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면 사생활 보호라느니 하면서 핑계만 댄다”며 “강제동원 기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위원회가 기록을 찾아 줬느냐 하면 그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위원회는 오는 6월 종합보고서도 없이 활동을 마칠 예정이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민병주 서울시의원, 조합설립 동의율 75% 완화로 소규모 정비사업 속도 낸다

조합설립 동의율 완화(재개발 75%, 재건축 70%)로 소규모 정비사업 추진이 빨라지고, 정부의 도심 공공주택 복합사업 기준 완화로 무주택 실수요자에게 주거 기회가 확대될 전망이다. 서울시의회 도시계획균형위원회 민병주 의원(국민의힘·중랑4)은 지난 8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한 ‘빈집 및 소규모주택 정비에 관한 특례법’(빈집법) 개정안과 관련해 “그동안 지연되던 소규모 정비사업에 속도를 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번 개정안은 서울시 모아주택이나 가로주택 정비사업에 해당하는 소규모 재개발의 조합설립 동의율을 기존 80%에서 75%로, 소규모 재건축의 경우 75%에서 70%로 낮추는 내용을 포함했다. 또한 서울시 다세대·연립주택의 베란다 샷시, 주차장 캐노피, 차양 등 소규모 위반 건축물에 부과되는 이행강제금을 감경하는 규정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사업 추진에 필요한 동의자 수가 줄어들어 절차가 신속해지고, 장기 표류하던 구역의 사업 정상화0가 기대된다. 민 의원은 “동의율 완화는 주민 갈등을 줄이고, 사업비 부담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며 “서울시 역시 소규모 정비 활성화를 위한 지원방안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thumbnail - 민병주 서울시의원, 조합설립 동의율 75% 완화로 소규모 정비사업 속도 낸다

2015-01-16 5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당신은 하루에 SNS와 OTT에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는가
우리 국민의 평균 수면 시간이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줄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도 크게 늘었다. 반면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의 이용자가 늘면서 미디어 이용 시간은 급증했다. 결국 SNS와 OTT를 때문에 평균수면시간도 줄었다는 분석이다. 당신은 하루에 SNS와 OTT에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는가?
1시간 미만
1시간~2시간
2시간 이상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