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뿌리깊은나무의 ‘민중자서전’
헌책방이라고 해서 책을 무조건 싸게 파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표지 뒤에 쓰인 정가보다 비싼 것도 있다. 큰 틀에서 보자면 책도 다른 물건과 비슷하게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 책이 처음 출판되어 서점에서 팔릴 때는 정가를 받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 그 책이 절판되면 더이상 구할 수 없게 되니까 헌책방에선 자연스레 가격이 올라간다. 하지만 모든 책이 그런 운명을 가지는 건 아니다. 절판됐다고 하더라도 그 책을 구하는 사람이 적으면 굳이 가격이 비싸질 이유는 없다.
다양한 지역에 뿌리를 내려 삶을 살아 온 평범한 민중의 입말을 그대로 살려 기록한 ‘민중자서전’. 우리나라 구술사 연구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책값이 달라지는 이유엔 좀더 복잡한 사정이 더해진다. 책의 내용과 저자의 철학이 훌륭해야 함은 물론이고 책 표지가 아름답다거나 장정의 훌륭함 등 책의 전반적인 만듦새도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어떤 경우엔 번역자나 편집자 그리고 출판사 대표의 철학도 가격에 반영된다. 이런저런 이유가 더해진 결과, 헌책방에서 비싸게 팔리는 책은 전체를 두고 보면 극소수일 뿐이다.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가 많다 보니 책 가격이 오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한동안 비싸게 거래됐다가 가격이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또 가격이 오를 때가 있고…. 책의 운명도 생명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헌책방 주인장은 이런 가격변동 요인을 그때그때 잘 알아두어야 한다. 가격이 비싸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책은 아니겠지만 절판된 책 중에 가격 등락폭이 오랫동안 변함없이 유지되는 책이라면 헌책방에서만큼은 널리 사랑받는 책이라 부를 만하다. 다른 헌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한 것까지 합치면 이쪽 계통에서 일한 지 10년을 훌쩍 넘기게 되었는데, 그러면 어떤 책이 손님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느냐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번 해봐도 되지 않나 싶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 창업자이자 최초의 한글전용 월간지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의 발행인 겸 편집인 한창기. ‘민중자서전’에서도 함께 작업한 사진작가 강운구가 찍은 사진.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발행한 잡지 ‘뿌리깊은나무’ 창간호. 본문에서 한자병기를 없애고 한글만 사용하는 파격적인 편집을 시도했다.
1984년에 창간한 잡지 ‘샘이깊은물’은 종래의 시각에서 탈피해 현대감각의 여성주의 관점을 드러낸 간행물이다. 표지모델도 유명 연예인을 지양하고 평범한 여성을 화면 가득 담아냈다.
민중자서전 세트. 1981년부터 10년간 총 20권이 출간됐다.
구술을 받아 만든 책 ‘민중자서전’은 지역 토박이 입말을 일절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본문에 실었다. 편집자는 본문 아래에 따로 주석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본문 아래에 단어별로 주석을 달아 놓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올바르게 읽어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위의 말을 대강 해석해 보면, 예전에는 모를 심을 때 못줄을 쓰지 않고 내키는 대로 대충 심었기 때문에 모 심어 놓은 논을 보면 줄이 똑바르지 못하고 흐트러졌다는 의미다.
참신한 편집과 알찬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은 ‘뿌리깊은나무’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사진은 폐간을 알리며 신문에 게재한 광고.
올해는 1997년에 세상을 떠난 한씨의 20주기다. 4월에는 서울시청 지하에 있는 서울시민청에서 20주기 추모전이 있었다. 공사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던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은 2011년 전남 순천 낙안읍성 근처에 개장했다. 그곳에는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의 여러 출판물 실물이 전시되어 있고 한씨가 살아 있을 때 수집했던 전통문화 관련 소장품들도 둘러볼 수 있다. 바야흐로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라야 대접받는 시대다. 하지만 그 어떤 새로움도 지나간 것에서 배우지 않은 게 없다. 오늘 ‘민중자서전’을 다시 읽으며 “오래된 미래”라는 말을 실감하는 값진 우리 문화를 곰곰 생각해 본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2017-05-0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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