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과 망명한 김덕홍씨, 회고록 출간…”유고 남기는 심정”
“이것만 개발하면 우리 국방과학자들이 더이상 할 일이 없다. 위성만 개발하면 정말 무서울 것이 없게 된다. 미국 놈들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다.”1987년 4월 11일 북한 국방과학원에서 중거리 로켓의 지상 연동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우리도 이젠 위성을 개발할 때가 됐다”며 했다는 발언이다.
지난 19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함께 남한으로 망명한 김덕홍 전 여광무역 사장은 최근 펴낸 회고록 ‘나는 자유주의자이다’에서 이런 내용을 밝혔다.
김덕홍씨는 현재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측근은 “죽기 전에 꼭 남기고 싶은 메시지를 책에 담았다고 한다”며 “유고(遺稿)를 남기는 심정으로 썼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김씨가 북한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자료연구실 부실장으로 일할 당시 접한 공개·비공개 자료들에 따르면, 김정일은 1987년 당시 “미국 본토를 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며 위성 개발을 지시했다고 한다.
김정일은 “위성 개발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 동무들이 지금까지 연구개발한 로켓들을 1, 2, 3 순서로 이어놓으면 그게 바로 위성이다”라며 “’죽으나 사나’ 이것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그는 전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87년 5월부터 위성 개발을 시작했는데, 경제 위기 탓에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고생하다가 꼬박 10년이 지난 1997년 8월에야 시험 발사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김씨는 김일성이 대외적으로는 “우리는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고 말했으나 북한 정권이 1955년 원자 및 핵물리학 연구소 설립 이후 핵개발에 줄곧 집착을 보여왔다는 내용도 밝혔다.
1991년 4월 초 핵개발에 돌파구가 되는 연구 성과를 달성했다는 보고를 들은 김정일은 “오늘은 내 평생소원이 풀리는 날”이라며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훈장과 TV 등 선물을 줬다고 한다.
김씨는 1980년대 말 영변핵연구단지에서 구소련 과학자들이 철수하자 김일성이 “나쁜놈들, 밥만 축내고 간다”고 화를 냈고, 김정일은 1981년 소련제 로켓 모방 설계를 위해 수입한 부품 중 한국산이 포함된 것을 보고 관련자 조사와 꼼꼼한 분석을 명령했다는 일화도 소개했다.
김씨는 책에서 ‘형님’과 ‘아우’로 함께 사선을 넘어 한국행을 선택했던 황장엽씨와 결별하게 된 경위와 소회도 밝혔다. 그는 2010년 황장엽씨의 영결식에도 불참했다.
그는 황씨가 남한에 와서도 북한에서 만들었던 ‘주체사상’과 다를 바 없는 ‘인간중심철학’에 집착을 보이면서 두 사람의 사이가 삐걱거렸다고 했다.
특히 2001년 두 사람에게 미국 의원과 단체에서 초청장이 왔는데 그는 북한 현실을 알리고자 방미를 원한 반면, 황씨는 국정원으로부터 개인 연구소 설립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방미를 포기한 것이 결별의 계기였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이제는 황씨를 이해한다고 했다. 책에는 “끝까지 김정일을 증오하고 반대한 것만으로도 형님은 북한 최고위층에서 망명한 노정객으로서의 소명을 다 하셨다”고 썼다.
김씨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국정원으로부터 “미국에는 몇백 달러만 주면 당신을 암살해줄 자들이 얼마든지 있다”며 협박을 당하는 등 여러 수모를 겪었다며 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교무부 지도원과 당 주체사상연구소 소장 서기(비서), 당 자료연구실 부실장 등으로 일할 때 많은 자료를 접했다며 북한 정권의 비화를 여럿 소개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의 전신인 ‘정로’에 북한 작가 한설야가 1946년 연재한 기사에는 김일성이 20년만에 만경대 고향집을 찾은 1945년 할아버지에게 “세번 장가를 갔다”고 말했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첫 부인으로 알려진 김정숙 이전에 한영애, 최희숙과도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이후 통째로 오려져 지금은 볼 수 없다고 김씨는 덧붙였다.
1953년 박헌영 숙청의 배경에는 스탈린의 비밀 지령이 있었다는 김일성의 육성녹음교시가 당 역사연구소에 남아있었던 사실도 전했다.
책에는 1984년 북한적십자회가 서울·경기 지역의 폭우로 생긴 남한 수재민에게 쌀 5만석, 직물 50만미터, 시멘트 10만톤 등을 보내겠다고 제안했을 당시 남한이 이를 받아들이자 이를 예상치 못했던 북한이 ‘날벼락’을 맞았다는 내용도 있다.
김정일은 이후 비공개회의에서 “남조선에 구호물자를 보내기 위해 꺼내 쓴 전쟁예비물자들을 지금도 채워넣지 못하고 있다. 전두환이 그걸 덥썩 받아들일 줄 몰랐다. 그때부터 경제가 허리를 펴지 못하게 됐다”고 개탄했다고 책에는 적혀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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