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판사 첫 재판 현장 가보니

시각장애인 판사 첫 재판 현장 가보니

입력 2012-05-12 00:00
수정 2012-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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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없었다. ‘시각장애인 판사’가 아니라 그냥 ‘판사’였다. 눈은 어두웠지만 누구보다 마음은 밝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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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으로는 국내 사법사상 처음 법관에 임용된 최영 판사가 11일 서울북부지법에서 열린 재판에서 변론을 경청하고 있다.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시각장애인으로는 국내 사법사상 처음 법관에 임용된 최영 판사가 11일 서울북부지법에서 열린 재판에서 변론을 경청하고 있다.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11일 오전 10시 서울 북부지법 701호 법정. 지난 2월 시각장애인 최초로 법관으로 임용된 최영(32) 판사의 재판 모습이 공개됐다. 최 판사는 민사11부의 좌배석 판사로 재판에 참여했다. 부장판사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선임 법관이, 왼쪽에는 초임 법관이 앉는 게 관례다.

최 판사는 동료 판사의 팔을 잡고 법정에 들어서 자리에 앉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최 판사의 모습과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 ‘디케’의 이미지가 묘하게 오버랩됐다. 디케는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해 눈을 가렸다. 최 판사는 시각장애인이라는 편견을 딛고 법관이 됐다.

자리에 앉은 최 판사는 노트북에 연결한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고 미리 USB에 담아온 사건 기록을 들었다. 재판을 위해 업무보조원이 증거 자료와 사건기록 등을 미리 한글 파일로 작성해 주면 최 판사는 음성변환 프로그램을 이용해 내용을 듣는다. 변론 도중 다른 판사들이 펜으로 메모를 하는 것과 달리 최 판사는 필요한 메모도 중간 중간 노트북에 기록했다. 재판 진행 기록을 음성으로 듣기 위해서다. 재판장의 공지 후 재판 내용도 따로 녹음됐다.

최 판사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변론 내용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최 판사가 주심을 맡은 전세권 설정에 대한 소송 변론도 짧게 진행됐다.

법원은 최 판사의 업무를 돕기 위해 지난 2월 최선희(30·여) 실무관을 채용했다. 사회복지사 어머니를 둔 최 실무관은 최 판사가 “시각장애인인데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데 감동해 이 자리를 자원했다.”고 밝혔다. 최 실무관의 주요 업무는 최 판사가 음성으로 사건 기록을 검토할 수 있도록 내용을 한글 파일로 작성해 주는 것. 사건이 접수되면 최 실무관은 최 판사와 사건 기록을 함께 읽고 최 판사가 필요한 부분을 결정하면 해당 내용을 한글 파일로 작성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 최 판사는 센스 리더 프로그램을 이용해 사건 기록을 청취한다. 눈은 어둡지만 듣는 속도는 비장애인보다 훨씬 빠르다. 눈으로 보아야 할 증거 자료는 손으로 만진다. 사진이나 그림은 내용을 설명으로 듣는다. 최 판사 역시 과거에는 시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자료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은 기우일 뿐이다.

이창열 공보판사는 “기억력이 좋아 두 번 정도만 설명하면 사건 내용을 모두 외워 버리더라.”고 전했다. 최 실무관 역시 “법학 전공이 아니라 어려울 때도 많지만 판사님이 차근차근 알려 주셔서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최 판사는 재판 뒤 이어진 기자 간담회에서 “시각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판사라서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장애에 얽매이지 않고 판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최 판사는 시각장애인의 임용을 여성 법관 임용에 비유했다. 처음 여성 법관이 임용될 때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지금은 사법부의 일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법원도, 저 자신도 변화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장애에 대한 편견이 여전한 우리 사회에 이날 최 판사가 남긴 말이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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