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단체 “인권후퇴 은폐하고 정부에 유리하게 작성” 비판
국가인권위원회가 한국 정부의 국제 인권규약 이행 정도를 감시해 유엔에 제출하는 자료에서 중요한 인권 관련 사안을 다수 삭제한 것으로 확인됐다.특히 세월호 참사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언론기관의 독립성 등 사회적으로 쟁점이 됐던 인권 사안들이 제외돼 시민사회에서는 인권위가 국내의 후퇴한 인권상황을 외면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1일 인권위 등 복수의 관계자 말과 관련 자료를 종합하면 인권위는 최근 유엔 자유권규약 제4차 국가보고서 심의를 위한 ‘정보노트’ 최종안을 마련, 의결을 앞두고 있다.
이 정보노트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자유권규약 이행 정도를 심의하는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UNHRC)에 참고 자료로 제출될 예정이다.
UNHRC는 가입국 정부와 그 나라 비정부기구(NGO), 독립적 인권기구로부터 각각 받는 참고자료와 여러 의견을 참조해 쟁점 목록을 작성하고 심의를 거쳐 ‘최종 견해’ 형식으로 정부에 권고사항을 보낸다.
애초 인권위 사무처 인권정책과는 지난달 15일 열린 제2차 상임위원회에서 규약 조항별로 총 65개의 쟁점 항목을 담은 정보노트 초안을 보고 안건으로 올렸다. 쟁점 항목에는 현황과 함께 정부에 질의해야 할 사항을 기술했다.
그러나 상임위 회의와 인권위원 회람을 거치면서 최종안에는 처음보다 34개가 줄어든 31개 쟁점 항목만 포함됐다.
삭제된 항목에는 ▲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 미등록 이주민과 그 가족의 인권 ▲ 기업의 강제노동 ▲ 언론기관의 독립성 ▲ 집회·시위 현장에서의 경찰의 채증 ▲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및 가압류 등 중요한 인권 사안이 다수 포함됐다.
특히 세월호 참사와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 관련 내용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도 수정 과정에서 전부 빠졌다.
일부 인권위원들은 인권위가 의견표명을 한 적이 없어서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거나 분량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 항목을 삭제하라는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주민 인권을 비롯해 삭제된 항목 가운데 일부 쟁점은 이미 인권위가 최소 한차례 의견표명을 한 적이 있다.
또 정보노트를 살펴보면 빠진 쟁점 항목보다 중요도가 낮거나 자유권 침해 정도가 심하지 않은 사안들로 채워져 있어 분량 문제로 특정 항목을 뺐다는 인권위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결국 인권위가 정부에 불리할 수 있는 민감한 인권 사안은 빼버리고 심의에 유리한 내용으로 정보노트를 작성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은 “논의 과정에서 분량을 줄이거나 늘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내용의 중요도와 심각성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면서 “사회적 파장이 있는 중대한 자유권 침해 사례가 있는데도 정치적 논란이나 인권위에 가해질 부담을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면 심각한 문제”라고 비판했다.
명숙 ‘국가인권위 제자리찾기 공동행동’ 집행위원은 “인권위가 우리나라의 심각한 인권 상황을 알려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고 인권 후퇴를 노골적으로 은폐하려는 것”이라며 “자유권규약위원회와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에 이와 관련한 의견서를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