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경제·정치 등 다양한 분야와 융합…‘인간에 관한 연구’2013년 개원 이화여대 뇌융합과학硏이 선도
2014년 11월 경기도 수원에서 일어난 ‘팔달산 토막살인’ 사건 항소심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피고인 박춘풍(55·중국 국적)씨는 동거녀를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유기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반(反)사회성 인격장애를 말하는 ‘사이코패스’ 진단과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박씨 측은 당시 사건은 우발적인 폭행치사였을 뿐이라며 사이코패스 여부를 다시 가리자고 주장했다. 검찰은 박씨가 사이코패스이며, 당시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맞섰다.
재판부는 박씨의 뇌 영상 촬영이 포함된 정신질환 감정을 의뢰했다. 주장만 들어선 안 되겠으니 뇌를 직접 조사해보자는 것이다.
박씨의 뇌 감정을 맡은 곳이 바로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이었다.
감정에서는 박씨에게서 사이코패스 경향이 발견되긴 하나 기준치를 넘지 않아 사이코패스로 볼 수는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정신감정 결과와 무관하게 워낙 흉악 범죄를 저지른 탓에 박씨는 항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범죄자의 뇌 영상을 토대로 사이코패스 여부와 범행의 고의성 등을 확인하려는 사법적 시도는 그 자체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 사법·정치·경제까지 접목…뇌과학의 무한한 가능성
뇌융합과학연구원에 따르면 인간 뇌의 작동 방식을 연구하는 뇌과학을 법학이나 경제학, 경영학, 심리학, 윤리학 등 인문·사회과학과 결합해 외연을 확장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박춘풍씨 사례처럼 범죄자의 뇌를 촬영해 재판에 참고하는 기술은 외국에서는 뇌과학계에서 10여년 전부터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범죄자의 성향 분석과 진술의 신빙성 판단 등 여러 용도로 활용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일례로 사이코패스의 뇌를 보면 두뇌에서 충동 조절, 타인에 대한 공감 등을 담당하는 변연계(邊緣系)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특성을 보인다. 변연계로 충동이 올라오면 뇌 앞쪽 전두엽(前頭葉)이 억제하는데, 사이코패스들은 전두엽의 발달도 미약하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범죄 충동을 잘 제어하지 못하고, 피해자의 고통을 느끼는 능력까지 떨어져 범죄를 저지를 개연성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학계는 분석한다. 이는 살인 등 강력범죄뿐 아니라 사기를 비롯한 경제범죄에도 적용된다.
실제 ‘팔달산 토막살인’ 사건의 박씨도 사이코패스 기준에는 미달했지만, 과거 사고로 눈을 다쳐 눈두덩 바로 뒷부분에 있는 안와전두엽이 손상된 것으로 판명됐다.
아직 법정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도 뇌 영상을 이용하면 신뢰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
기존 거짓말탐지기는 땀, 심장 박동, 체온 변화 등 자율신경의 무의식적 작용을 분석하는데 숙련된 범죄자는 이런 생체 반응도 덜 보인다.
이때 뇌 영상을 촬영해 보면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까지 짧은 순간이라도 거짓말과 관련된 뇌 영역이 활발해지는 것으로 확인되면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뇌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뇌과학의 학문적 전제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뇌융합과학연구원은 현재 특정 자극에 따른 뇌 반응을 관찰하는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이용해 거짓말탐지기 신뢰도를 높일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인간이 어떤 디자인이나 색상을 편안하게 느끼는지도 영상에 나타난 뇌의 반응으로 확인된다. 이는 기업의 제품 설계와 홍보, 건축 등 여러 분야에 활용될 수 있다.
여론·선호도 조사의 정확도도 높일 수 있다. 설문이나 대면 조사에서는 응답자가 거짓 답변을 할 수 있지만 뇌 영상에는 응답자가 숨길 수 없는 뇌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뇌과학은 정치학이나 경제학과도 결합해 ‘신경정치학’, ‘신경경제학’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김지은 이화여대 뇌인지과학과 교수는 “후보자의 특정 복장을 유권자가 어떻게 느끼는지, 소비자들이 일반 커피보다 다소 비싼 ‘공정무역’ 커피를 왜 선택하는지 등 인간의 사회적 반응과 의사결정 과정도 뇌과학으로 규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해 행동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외국 연구 사례도 있다. 인간에게서만 발달한 전두엽 중 ‘우측 배외측 전전두엽’ 부위에 전류를 흘리자 타인과 협동하는 경향이 높아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이 한 예다.
이를 악용하면 대중의 행동을 조작하는 일까지 가능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때문에 뇌과학적 방법론의 윤리적 측면을 다루는 ‘신경윤리학’도 등장했다.
◇ ‘박춘풍 뇌 감정’ 뇌융합과학硏…“뇌과학 융합연구 선도”
뇌과학으로 우울증 등 정신질환의 원인과 치료법을 찾는 의학적 연구는 그간 국내에도 많이 진행됐다. 그러나 생명과학, 컴퓨터공학, 경제학, 법학 등 여러 학문 분야와 뇌과학을 융합해 인간을 연구하는 활동은 아직 초기 단계다.
2013년 4월 설립된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은 이런 연구를 국내에서 선도하고 있다. 국내 뇌과학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류인균 원장을 필두로 교수와 석·박사과정 학생, 임상심리 전문가 등 55명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설립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간 대구 지하철 참사 피해자 등 대형 재난 피해자와 북한이탈주민, 소방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방대한 뇌 영상 자료를 확보하는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생존자들에 대한 연구에서는 배외측 전전두엽이 두꺼워진 사람일수록 사고 후 스트레스에서 빨리 회복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배외측 전전두엽의 기능 중 하나는 나쁜 생각에 집중하지 않고 주의를 돌리는 ‘선택적 주의력’인데, 회복도가 좋은 피해자들은 이 부위를 많이 썼다는 뜻이다.
0.5㎜ 이하까지 뚜렷하게 촬영할 수 있는 3테슬라(Tesla)급 자기공명영상 장치(MRI)를 2대나 보유하는 등 시설 면에서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 연구원 측의 자평이다.
국내외 유수 기업으로부터 의뢰받아 제품 디자인 선호도 관련 연구를 하는가 하면 범죄 피해자의 외상 후 스트레스 극복을 돕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기술을 특허 출원하는 등 연구 영역을 넓히고 있다. 심장 박동 등 생체신호를 스마트폰으로 감지해 외상 후 스트레스에 따른 신체 긴장도를 측정하고 상황별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술도 개발 중이다.
작년에는 미래창조과학부로부터 250억원 규모의 뇌과학 연구과제를 땄다. 범죄나 사고 피해자, 사건·사고 관련 스트레스에 늘 노출되는 경찰관이나 소방관의 외상 후 증후군(PTS)을 진단하고 적절한 치료법을 개발하는 사업이다.
이화여대는 이 분야 연구인력을 양성하고자 2010년 일반대학원에 뇌·인지과학과를, 2015년에는 학부 과정에 뇌·인지과학전공을 신설했다.
강의에는 뇌과학, 생명공학, 약학, 컴퓨터공학 등 이공계 출신 교수들뿐 아니라 현직 법조인, 공무원, 건축가 등도 참여한다. 교육과정에는 경제·경영학 원론, 마케팅 전략, 사회심리학 등까지 포함된다.
류인균 원장은 “뇌과학과 여러 학문의 융합은 결국 인간을 더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사회에 도움을 주는 것이 목표”라며 “뇌과학을 기초로 삼아 현대사회의 여러 현안에 종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