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했는데도 주소 오인해 24분 지나서야 현장 도착
경찰이 늑장 출동하느라 막지 못한 살인 사건 피해자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겼다.서울서부지법 민사22단독 황병헌 판사는 피해자 이모(사건 당시 34세ㆍ여)씨의 부모와 자녀 등 유족이 국가가 1억7천여만원을 배상해야 한다며 낸 소송에서 “국가는 8천3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고 17일 밝혔다.
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9월 12일 이씨는 교제 중이던 A씨의 어머니인 박모(66)씨와 말다툼을 벌이다 그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졌다.
박씨는 이날 저녁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씨와 전화로 크게 다퉜다. 이씨가 따지려고 박씨의 용산구 자택 앞으로 오겠다고 하자 박씨는 흉기를 들고 나갔다.
불안감을 느낀 아들 A씨는 오후 9시 12분께 “어머니가 여자친구와 전화로 다투고 나서 흉기를 들고 여자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112에 신고했다.
A씨는 15분 뒤 한 차례 더 신고 전화를 했으나 경찰은 끝내 오지 않았고 박씨는 이씨를 만나 말다툼을 벌이다 흉기로 명치를 찔러 살해했다.
관할인 용산경찰서 상황실은 신고를 접수하고서 곧바로 인근 파출소 순찰차에 출동 지령을 내렸으나 순찰 경관들이 중복 신고로 오인해 현장에 늦게 도착한 것으로 드러났다.
A씨가 첫 신고를 하기 10분 전 살해 현장에서 68m 떨어진 주소로 가정폭력 신고가 들어왔다. 순찰 경관들은 A씨의 신고가 이와 동일한 사건이라고 착각하고 현장으로 향하지 않았다.
용산서 상황실은 A씨가 재차 신고하자 “다른 사건인 것 같으니 A씨가 말한 주소지로 가라”고 지시했으나 이번에도 순찰 경관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가정폭력 신고 주소지로 가고서는 계속 “동일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상황실이 “어머니가 칼을 가지고 있다는데 칼을 확인했느냐”고 묻자 순찰 경관들은 “여기 아들이 좀 정상이 아닙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조금씩 술에 취했습니다”라고 동문서답했다.
순찰 경관들은 첫 신고가 접수되고 24분이 지난 9시 36분께야 두 신고가 서로 다른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씨 살해 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들이 현장에 도착한 9시 40분 이미 박씨는 흉기를 휘두른 뒤였다.
황 판사는 “주소가 명확히 다르고 상황실이 이에 대해 확인 요청까지 한 점에 비춰보면, 24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경관들이 과실로 현저하게 불합리하게 공무를 처리해 직무상의 의무를 위반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박씨가 나이 많은 여성이어서 순찰 경관들이 살인사건 발생 전에 현장에 도착했다면 사건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직무상 의무 위반과 살인사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며 이씨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황 판사는 다만 “순찰 경관들은 박씨에 대해 일반적인 감독의무를 부담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단지 신고를 받고도 착오로 아무런 대처를 못해 범행을 막지 못한 것에 불과하며, 이씨가 박씨와 싸우기 위해 일부러 찾아간 점 등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며 국가의 책임 비율을 20%로 제한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