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최고 행정법원 “부르키니 규제 위법”이라지만… 유럽으로 번진 논쟁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8년 집필한 ‘공산당 선언’의 도입부에서 당시 유럽의 정세를 다음과 같이 간결히 정리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유럽의 모든 세력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은 이 유령을 몰아내려고 신성 동맹을 맺었다.” 이 문장에서 ‘공산주의’를 ‘부르카’로 바꾸면 현재 유럽의 상황에 적용된다. 무슬림 여성의 눈과 얼굴을 비롯해 전신을 가리는 의상인 부르카의 착용 문제를 두고 유럽 전역이 논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 정부들은 무슬림 여성의 사회 통합과 치안 강화를 명분으로 부르카 착용을 규제하려 하는 반면 부르카 규제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무슬림 여성을 소외시킬 수 있다며 반발하는 목소리도 높다.부르키니 차림의 한 무슬림 여성(오른쪽)이 지난 16일(현지시간) 튀니지 해변에서 더위를 식히면서 일반 수영복을 입고 지나가는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 가르엘멜 AFP 연합뉴스
모로코 마라케시의 한 수영장에 부르키니 착용 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모로코월드뉴스 캡처
인도 카슈미르 스리나가르에서 한 여성이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를 입고 시내를 걸어가고 있다. 스리나가르 AP
●獨, 反이슬람 정서에 부르카 부분 금지 추진 논쟁 점화
독일 정부는 최근 부르카 착용을 부분적으로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 독일 내 부르카 논쟁에 불을 지폈다. 독일에는 400만명의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지만 대부분 세속주의 성향이 강한 터키 출신이라 독일 거리에서 부르카를 입은 여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부르카 착용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으나, 지난해 시리아 등 중동 난민이 대거 유입되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부르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토마스 데메지에르 독일 내무장관은 지난 19일(현지시간) 학교, 대학, 법정, 등기소에서 부르카와 같이 얼굴을 가리는 베일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법안은 운전 중이나 출입국 심사를 받을 때도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며 교사나 공무원이 직장에서 부르카를 입을 수 없도록 규정했다. 데메지에르 장관은 “독일 사회의 통합을 위해 필요한 장소에서 얼굴을 보여 주도록 법적 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데메지에르 장관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부르카 착용을 개인적으로 거부하지만 법적으로는 금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독일 내 반(反)이슬람 정서가 강화되고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득세하자 집권 여당인 기독민주당과 기독사회당 내에서는 부르카를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졌다. 이에 메르켈 총리와 데메지에르 장관이 다음달 일부 지역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내 강경론자들을 달래고 극우 정당을 견제하기 위해 한발 물러섰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음달 선거가 실시되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와 베를린시의 기독민주당 대표는 이날 데메지에르 장관의 기자회견장에 참석해 부르카 착용 금지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佛, 부르키니女 벌금·경찰이 베일 벗게 한 사진 논란
공공장소에서 부르카를 비롯해 얼굴을 가리는 베일의 착용을 이미 금지한 프랑스는 부르카에 이어 ‘부르키니’ 규제에 나섰다. 부르키니는 부르카와 비키니의 합성어로 무슬림 여성이 이슬람 전통을 지키면서도 물놀이를 할 수 있도록 고안된 전신을 가리는 수영복이다. 이달 들어 남부 휴양지인 니스와 칸을 비롯해 프랑스 지방자치단체 30여곳이 공공질서에 대한 위협, 수상 안전, 위생 등의 이유로 부르키니를 금지하고 단속에 나섰다. 시암이라는 이름의 무슬림 여성은 칸 해변에서 부르키니를 입고 있다가 단속 나온 경찰에게 11유로(약 1만 3000원)의 벌금을 내야만 했다고 AFP가 지난 23일 보도했다.
프랑스 인권단체인 인권연맹(LDH)은 니스행정법원에 “부르키니 규제는 위법”이라고 주장하며 30여곳의 지방정부 중 빌뇌브루브시를 제소했으나 법원은 지난 22일 “공공 질서 유지를 위해 필수적이고 적절하며 비례의 원칙에 부합하는 규제”라며 지방정부의 손을 들어 줬다. 니스에서는 지난달 14일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대혁명 기념일 불꽃놀이를 즐기던 시민과 관광객들을 향해 트럭을 몰고 돌진해 85명이 숨지고 300여명이 다친 바 있다.
부르키니 공방이 계속되던 중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이 23일 보도한 한 사진이 프랑스 전역을 뒤흔들었다. 사진에는 니스 해변에서 한 여성이 남성 경찰 3명에게 둘러싸여 상반신을 가리는 베일을 벗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니스시 당국은 이 여성이 베일 안에 부르키니를 입고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무슬림계와 여성단체들은 “여성이 강압에 의해 옷을 벗게 됐다”며 분노했다.
LDH는 니스법원의 판결에 불복해 최고 행정재판소인 국사원에 상소했고, 국사원은 26일 니스지법의 판결을 뒤집고 빌뇌브루브시의 부르키니 규제는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이에 부르키니 규제를 도입한 다른 지방정부도 규제를 폐지하거나 유예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뉘엘 발스 프랑스 총리는 전날 “부르키니는 여성의 노예화를 상징한다”며 부르키니 금지 입장을 고수했고, 2017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부르키니 규제를 도입하겠다고 공약해 한동안 여진은 계속될 전망이다.
정교 분리 원칙과 세속주의를 고수하는 프랑스는 2010년 치안 유지를 이유로 공공장소에서 얼굴 전체를 덮는 니캅과 부르카의 착용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150유로(약 18만 8000원)의 벌금을 물리는 법을 채택했다. 2015년까지 부르카 착용으로 벌금형이 선고된 사례는 1500여건에 이르며 대부분 상습범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앞서 2004년에는 학교 교실에 부르카를 비롯해 유대교의 키파(테두리 없는 베레모), 기독교의 십자가 등 종교적 상징물을 반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한 바 있다.
●“여성성 덮어·치안 유지” vs “신앙 자유·소외 부추겨”
유럽에서는 프랑스를 필두로 벨기에, 네덜란드, 불가리아가 전국적으로 부르카 착용을 금지했으며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러시아에서는 지역별로 부르카 착용 금지 여부가 다르다. 부르카 부분 금지를 추진 중인 독일에서는 최대 일간지 빌트가 지난 12일자 1면에 “부르카의 금지를 요구한다”고 공식화하며 여론 조성에 나섰다. 빌트는 “부르카는 여성의 정체성과 개성을 없애고 시각적으로 인간다움을 잃게 한다”며 “자유로운 생활양식에 반하는 자명한 불관용”이라고 강조했다. 부르카 규제에 찬성하는 측은 니캅이나 부르카가 얼굴을 가려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해 치안 유지 활동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르카가 무슬림 여성의 의사소통과 대외 활동을 제약해 사회 통합을 저해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부르카 규제가 오히려 무슬림을 자극해 치안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안젤리노 알파노 이탈리아 내무장관은 지난 17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부르키니 규제에 대해 “무슬림을 더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며 “테러 공격을 유발할 수 있는 이런 자극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알파노 장관은 “이탈리아 헌법은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면서 “이탈리아에는 150만명의 무슬림이 거주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를 테러리스트나 테러 동조자로 간주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부르카 착용을 금지함으로써 오히려 무슬림 여성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해 유럽 사회에서 더욱 소외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르키니는 젊은 무슬림 여성에게 해변의 자유 선물”
유럽 내 부르카 논쟁은 여성 인권, 종교의 자유, 치안 등 여러 문제가 얽히면서 복잡해지는 양상이지만 일각에서는 부르카 착용 여부는 결국 여성 개인의 선택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프랑스 툴루즈대학의 종교 전문가이자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무슬림 여성인 림사라 알루안은 AP에 “반부르키니 정책은 이슬람에 대한 낡은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며 “여성의 권리에는 몸을 가릴 권리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파리 도심의 부르키니 매장에서 일하는 젊은 무슬림 여성 2명은 NYT에 “2004년 부르키니가 처음 출시되기 전에는 해변에서 발을 물에 잠깐 담그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제트스키도 즐긴다”고 말했다. 그들은 “부르키니는 젊은 무슬림 여성들에게 한낮에 해변에서 놀 수 있는 기회를 줬다. 부엌에 갇혀 있던 우리 어머니 세대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며 “정부는 부르키니를 입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무슬림 여성을 환영해야지 벌금을 물려 집으로 되돌려 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2016-08-27 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