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용택
추석이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들녘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간다. 둥근 달이 높이 떠서 산천을 비춘다. 나는 올해 전주 살다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왔다. 고향에 와서 맞는 첫 추석이어서 설렌다. 고향에 돌아와 살면서 옛일들이 하나하나 되짚어진다. 시골 와서 제일 처음 듣는 새 소리가 소쩍새 소리였다. 소쩍새가 처음 울던 밤 어머니는 해마다 이렇게 말씀 하셨다. “내일 아침 화장실에 앉아 ‘어젯밤에 소쩍새가 처음 울었지’ 이렇게 생각을 해 내면 그 사람은 영리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어젯밤 일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늘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며 “앗차! 어젯밤에 소쩍새가 처음 울었지” 한다. 소쩍새가 울고 진달래가 피면 이 나라 산천이 잠에서 깨어난다. 이른 봄부터 새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새든지 한 일주일 울다가 사라진다. 그러면 또 다른 새가 울기 시작하고 그 새 울음소리가 사라지면 또 다른 새가 운다. 그런데 한번 울기 시작하면 가을이 다 갈 때 까지 우는 새가 바로 소쩍새다. 새들이 대게 아침에 울다 잠잠해지는데, 소쩍새는 낮 동안은 울지 않고, 밤에만 운다. 지금 새벽 3시 50분인데 소쩍새가 운다.
창비 제공

김용택 시인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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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 희미하게 밝아 오면 새들은 더 극성스럽게 운다. 그러면 나는 카메라를 메고 강물을 따라 산책을 나간다. 그때 강을 건너오는 오토바이 소리와 오토바이 불빛이 보인다. 종길이 아재가 벌써 강 건너 논에 물을 보고 오는 길이다. 아재는 전형적인 농부다. 농부들의 특징은 절대 농사일로 헛짓을 안 한다. 종길이 아재가 아무 일도 안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나는 아직 없다. 딱 한 번 아침 비가 내리는 날 노란 우산을 쓰고 강가에 서 있다가 고요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빈 몸으로 어딘가를 다니는 일은 극히 드물다. 아재가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논을 보러 다닐 때 내 동창 승권이가 밭가에 서 있을 때도 있다. 바로 옆집에 사는 판조 형님이 일어나 텃밭 곡식을 살피고, 형수님이 일어나 밥을 하고, 당숙모가 일어나 텃밭으로 가신다. 만조 형님이 자전거를 타고 논으로 간다.
집 앞에 마늘과 참깨와 고추와 가지와 상추와 오이와 방울토마토가 순서를 지키며 사라지고, 들깨와 배추가 순서에 따라 나타난다. 벼가 노랗게 익어 가고 밤이 익어 떨어진다. 강물은 하늘처럼 푸르고, 오리들은 강물에 둥둥 뜬다. 세상의 모든 풀들과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다. 가을은 부산하고 농부들의 발길은 추석을 향해 빨라진다. 농사일에는 쓸데없는 내 맘도 바빠진다. 마을 뒷산과 앞산에 벌초 된 조상들의 묘가 보인다. 모든, 벌레와 바람과 비와 햇살과 그 모든 것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살다 보니, 추석이다. 아들딸들이, 내 손자들이 둥근 달을 따라 저 동구에 나타날 것이다.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는 부모님들의 손길이 바쁘다. 어서 오라, 아직도 고향은 안녕하다.
김용택 시인은
1948년 전북 임실 출생. 1982년 창작과비평사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섬진강’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꽃산 가는 길’, 산문집으로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오래된 마을’ ‘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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