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8년 이후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듯”

“1588년 이후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듯”

이순녀 기자
이순녀 기자
입력 2021-06-29 21:58
수정 2021-06-30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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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금속 유물 왜 묻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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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유적 발굴 당시 모습
인사동 유적 발굴 당시 모습 서울 인사동 유적에서 매우 희귀한 조선 전기 금속활자뿐만 아니라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하던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부품과 물시계 옥루 혹은 자격루의 부속품인 ‘주전’(籌箭)으로 추정되는 동제품까지 한꺼번에 출토됐다고 문화재청이 29일 밝혔다. 사진은 발굴 당시 인사동 유적의 모습. 2021.6.29 문화재청 제공
조선 전기 금속활자와 과학 유물이 대거 묻혀 있던 지역은 서울 종로2가 사거리 북서쪽으로 피맛골과 인접한 곳이다. 조선 전기까지 한성부 중부 8방 중 하나로, 경제·문화 중심지인 견평방(堅平坊)에 속했으며 주변에는 관청인 의금부와 상업시설인 운종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금속활자와 주전의 동제품은 항아리 안에 담겼고 일성정시의와 총통류, 동종은 항아리 옆에 놓여 있었다. 특히 금속활자를 제외한 나머지 유물은 작은 파편으로 절개돼 출토됐다. 활자들은 대체로 온전했지만 불에 녹아 서로 엉겨 붙은 것들도 일부 확인됐다.

발굴조사를 맡은 오경택 수도문물연구원장은 “출토 지역 자료를 찾아봐도 관청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면서 “관이 지은 건물은 아닌 듯하고, 평범한 민간에서 사용한 창고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출토 유물들이 일반인은 접하기 어려운 귀한 유물이란 점에서 의문이 남는다. 오 원장은 “16~17세기 청진동, 관철동, 관수동 등 청계천 주변에선 이처럼 퇴장 유적, 즉 도망가면서 물건을 묻어 놓고 가는 사례가 많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금속품을 모아 고의로 묻었고, 나중에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드는 ‘재활용’을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문화재청은 “발굴 유물 중 제작 시기가 가장 늦은 것이 1588년으로, 그 이후에 같이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것 같다”면서 “보존 처리와 분석 과정을 거쳐 분야별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2021-06-3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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