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서 15대 조부, 만주서 조부 잃은 권대용씨

노량해전서 15대 조부, 만주서 조부 잃은 권대용씨

입력 2014-08-28 00:00
수정 2014-08-28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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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들이 우리사회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실지”

“가난만 남았지만 나라를 구하려 목숨 바친 조상들이 한없이 자랑스럽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권대용(66·경북 안동)씨는 최근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을 소재로 한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다는 소식에 오랫동안 잊고 지낸 조상을 떠올렸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함께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함께 최후를 맞이 한 병암 권전(權詮·1549-1598) 선생이 그의 15대 종조부(큰할아버지)다.

권전은 1582년(선조 15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뒤 경남 고성에서 현령을 지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가 ‘만호’라는 벼슬을 받고 조선 수군의 일원이 된다.

전투마다 용맹을 떨친 그는 옥포, 사천, 당포, 명량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쌓아 아장(亞將:준장군)의 지위에 오른 뒤 장군선(船)에 올랐으며 이순신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다가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국했다.

그 후 314년이 흐른 1912년 초 추운 겨울날 경상도 안동에서 권대용씨의 할아버지인 추산 권기일(權奇鎰·1886∼1920) 선생이 8명 가족을 거느리고 북쪽을 향한다.

천석꾼 부자였으나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1910년)의 분을 참지 못하고 26세 나이에 전 재산을 처분한 뒤 만주로 떠났던 것.

그곳에서 추산은 경학사와 부민단 등 독립운동을 위한 교육 활동에 매진하다가 1920년 8월 34세 젊은 나이에 신흥무관학교 부근 수수밭에서 일본군의 총칼에 무참히 살해됐다.

엄청난 재력가였으나 독립운동에 모든 걸 바친 ‘죄’로 그의 후손에게 남은 건 가난 뿐이었다.

추산의 아들(권형순 옹. 98년 작고)은 만주에서 태어나 갖은 고생 끝에 광복 후 조상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 와서 손수레를 끌며 간장을 팔아 겨우 생계를 이었다.

간장 장사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권대용씨는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중학교 1학년을 휴학한 뒤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고 그 길로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권씨는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개인택시 기사로 일하면서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400여년 전 남쪽 바다에서, 그리고 100여년 전 이역만리 북녘 만주에서 일본군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조상을 잊지 않으려는 권씨 가족의 애국심은 휴대전화번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권씨 부부의 전화번호에는 829가, 아들과 딸 전화번호에는 815가 들어있다.

권씨는 “나라 뺏긴 고통이 어떤 것인지 역사가 증언하고 있는데 우리는 남의 일인양 너무도 쉽게 잊고 사는 것 같다”면서 “목숨바쳐 나라 지킨 조상들이 지금 우리사회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실지 마음이 무겁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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