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했던 청년 실명·거동 불편
“화학물질 노출·스트레스 중첩다발성경화증 발병에 기여”
1·2심 뒤집고 노동자 손 들어줘
원인 불명 질병 산재 기준 될 듯
대법원이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일하다 희귀질환인 ‘다발성경화증’을 앓게 된 노동자에 대해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은 하급심 판결을 깨고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이 반도체·LCD 공장 노동자의 산재 사건 중 질병과 근무 환경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첫 사례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번 판결이 첨단산업 노동자의 원인 불명 질병을 둘러싼 법정 싸움에 기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대법원은 “이씨가 입사 전 건강 이상이나 가족력이 없었는데 삼성전자 LCD 공장에서 3년째 근무하다 21세에 다발성경화증이 발병했다”면서 “다발성경화증 평균 발병 연령인 38세보다 훨씬 이른 발병”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유기용제 노출, 주야간 교대근무, 업무 스트레스 등 질환을 촉발하는 요인이 중첩될 경우 발병 또는 복합적으로 기여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특히 “삼성과 관련 행정청은 공정 취급 유해화학물질 정보를 영업비밀이라며 공개를 거부했다”면서 “원고가 (발병 원인을) 입증할 수 없었던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므로, 이를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씨는 2002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LCD 패널 화질검사 업무를 맡았다. 4조 3교대 혹은 3조 2교대 근무로 패널 화면의 색상과 패턴을 눈으로 검사하는 업무였다. 이씨는 하루 12시간 이상 전자파를 쐬고 이소프로필알코올이란 화학물질에 노출됐다. 2003년 아토피성 결막염, 자율신경 기능 장애, 가슴 통증, 관절염을 앓게 됐다. 이씨는 2007년 퇴사했고, 이듬해 신경섬유가 서서히 파괴돼 근육과 장기가 마비되는 불치병인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았다. 다발성경화증 발병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기용제나 스트레스, 흡연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발성경화증이란 신경섬유가 서서히 파괴돼 근육과 장기가 마비되는 불치병으로 유병률이 10만명당 3.5명에 불과하다.
이후 증상이 악화돼 한쪽 눈을 실명하고 거동이 불편해진 이씨는 2010년 7월 업무상 재해를 주장하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으나 공단이 이를 거부하자 2011년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은 “이씨가 업무로 인해 다발성경화증이 발병했거나 자연 경과적 진행 속도 이상으로 악화했다고 보기 어렵다”며 심리 3년 만에 이씨 패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씨의 발병·악화는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될 여지가 크다”며 이씨 승소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판결에 대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산재 피해자·유가족 모임인 시민단체 반올림의 이종란 상임활동가는 “노동자에게 (발병) 입증 책임을 돌리는 잘못된 법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본 판결”이라고 밝혔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2017-08-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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