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 한달여 앞두고 한의계 내 입장 정리 못해
정부가 올해 10월 시행을 계획으로 건강보험 재정까지 떼어 둔 ‘첩약 건강보험 시범사업’이 시작도 못하고 폐기될 위기에 놓였다. 시행 시기가 임박했지만 사업 참여 여부를 놓고 한의사단체 내부 갈등이 격화돼 정부와 한의계 사이에 본격적인 논의조차 시작되지 못하고 있다.◇ 값비싼 치료용 첩약 건보 적용 길 열었지만…
보건복지부는 작년 10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한방 치료용 첩약에 3년간 시범사업 형태로 건강보험 혜택을 주기로 결정하고, 연간 2천억원에 이르는 건보 재정도 배정했다.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대상은 첩약을 쓸 때 우수한 효과가 기대되는 여성·노인질환 중에서 선정하기로 했다.
정부는 시범사업의 결과를 분석해 성공적이면 첩약에 계속 건강보험을 적용할 방침이었다.
첩약에 건강보험 혜택이 주어질 경우 그동안 한방치료를 원하면서도 지나치게 높은 약값 부담 때문에 이용하지 못한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의학 시장의 전체 ‘파이’가 커질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건정심은 작년 회의에서 첩약 건보적용 시범사업을 시작하려면 관련 직능단체간 합의를 전제조건으로 걸었다. 한의사와 약사의 갈등을 염두에 둔 조건이었다. 예상대로 한의사와 약사의 입장은 팽팽히 맞섰다.
약사단체는 1993년 한의사·약사 분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한약사와, 기존 약사에게 부여한 경과조치적 성격의 한약조제시험을 통과한 한약조제약사 모두가 첩약 건보 적용 시범사업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의계는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약사와 한약조제약사 참여를 절대 수용할 없다고 맞섰다.
문제는 사업의 구체적인 모델을 놓고 정부와 직능단체의 협상은 커녕 한의사협회 내부에서조차 의견 조율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의계 알각에선 ‘이러다 첩약 건보 적용 기회를 아예 날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 한의계 내홍으로 논의 시작도 못해
지난해 건정심이 예고한 시행 시기가 불과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정부와 한의계는 구체적인 사업 모델에 대해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 이는 단체간 대립에 앞서 한의계 내부에서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다.
대한한의사협회 집행부는 이번 첩약 건보 적용 시범사업을 아예 거부하자는 쪽이다. 그러나 한의계 내부엔 일단 정부와 바람직한 적용 모델을 논의하자는 ‘협상파’도 적지 않다.
실제로 지난달 집행부에 대한 감사 시행과 첩약 건보 적용 등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임시 대의원총회에서 첩약 건보 적용 방안을 검토하자는 의견이 다수로 채택됐다. 대의원총회는 협회 정관에 따른 최고의결기구다.
한의협 집행부는 그러나 전체 회원의 뜻이 더 중요하다며 대의원총회의 의결을 따르지 않고 민법을 준용한 ‘사원총회’를 다음달 8일에 잠실체육관에소집해 놓았다.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의료법에 정해진 보수교육도 같은 날 열기로 했다.
한약을 선호하는 환자에게 건보 혜택의 길을 트려고 했던 정부는 난처해졌다.
복지부는 최근 한의협에 사원총회와 관련한 공문을 보내 “보수교육은 정치적 행사와 연계하여 진행할 수 없으며, 실내체육관 등에 운집한 상태로 실시하는 것은 보수교육 취지와 맞지 않으니 시정하라”고 요청했다.
한의협의 김태호 홍보이사는 23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대의원총회보다는 전 회원의 의견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복지부의 우려가 해소되는 방식으로 행사를 진행할 것”이라며 강행 의지를 밝혔다.
복지부 관계자는 “한의계 내홍으로 10월 이전에 첩약 건보 적용 시행 여부가 결정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시행 시기를 연기하려면 건정심 위원들의 합의를 거쳐야 하므로 아예 무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전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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