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규관 시인
지구가 어렸을 때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대기 상태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을 비롯한 지금의 유기체들은 훗날 산소의 양이 늘어나면서 창조된 결과물이다. 아직도 용암이 들끓는 화산 속이나 뜨거운 땅 밑에는 그에 적합한 박테리아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산소가 크게 증가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산소를 토해내는 식물의 공도 아주 크다고 한다. 사람을 비롯한 유기체는 극단적으로 말해 산소가 만들어 낸 존재들이며, 지금도 식물이 뿜어내는 산소에 크게 빚지고 산다.
제주도가 비자림로의 삼나무를 베어 내 길을 넓히는 공사를 재개했다. 교통 정체를 핑계로 대고 있지만, 진짜 그 속내는 다른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제주도의 활동가들은 결국 제2공항과 결부된 도로 확장 사업이 아니겠는가 의심하고 있다. 정치·행정 권력의 노림수는 보통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복합적이어서 하나의 이유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개발 사업들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터전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편의를 핑계 삼는다.
도대체 근대 문명은 삶의 조건이 불편한 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그러나 불편함을 편리함으로 바꾸는 일에 고상한 휴머니즘이 그 원인인 경우는 별로 없다. 불편함을 편리함으로 바꾸는 일에는 언제나 사적 이해관계가 앞서지만, 언제나 그 일의 주체들은 그 사실을 숨긴다. 따라서 개발 사업이 정말 인간의 편의에 도움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효과를 따지는 데에 열중하게 되면 논리적으로 또는 실증적으로 말리게 돼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공동체는 분열된다.
나는 도시인들이 얼마간 앓고 있는 분열증의 원인이 자연을 멀리하거나 혹은 자연을 단지 가끔 찾는 관상용으로 대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도시화가 보편화된 현재 시점에서 이런 입장은 쉽사리 소박한 자연주의로 치부되기 십상이지만, 앞에서 말했듯 우리가 탄생한 근원지를 잃어버리거나 파괴하는 일은 존재의 근거 자체를 스스로 없애는 일이다. 자연은 단순히 낭만적인 감상의 대상이 아니다. 어느 시인은 시에서 자연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폭력이라고 하던데, 내가 보기에는 그런 인식 자체가 자연에 대한 무지가 낳은 폭력이다.
자연의 힘은 곧 신의 힘이며, 만물은 이것에 의해 만들어지고 결정된다는 스피노자의 전언이 있은 지 300여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이 말의 심오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에 의하면 개별자들은 신의 어떤 속성(들의 연합)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세계는 인격신에 의해 단 한번 창조된 게 아니다. 자연의 힘이 지금도 숱한 개별자들을 우리 앞에 펼쳐 내고 있다. 단지 우리의 인식 능력이 그에 미치지 못해 모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나무 한 그루나 꽃 한 송이, 파도 한 자락도 신이 만들어 낸 것이며 그것들은 인간들과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
제주도 비자림로의 삼나무를 아무렇지 않게 싹둑싹둑 잘라 내는 일에 대해 너무 거창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아 면구스럽지만, 우리가 편리함과 ‘돈 되는 일’에 너무 절어 사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근원적인 언어를 더이상 자제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제주도의 사정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기저기서 나무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베어 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굳이 신 혹은 자연을 들먹일 것도 없이 나무를 함부로 베어 내는 사람들에게 한 여름날 나무 그늘 없는 뙤약볕 아래에서 서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길 권해 드린다. 아니면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 종일 서 있기’ 같은 형벌을 입법해야 하나?
2019-04-04 3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