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경의 배회의 기술] 말을 트는 시간/작가

[김가경의 배회의 기술] 말을 트는 시간/작가

입력 2022-05-17 20:34
수정 2022-05-18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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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경 작가
김가경 작가
집 근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 사람이 차선의 중앙경계선을 넘고 있었다. 눈에 익어 유심히 보니 집 앞 골목에서 배달가게를 하는 청년이었다. 잠깐 사이 그는 슬리퍼를 끌고 빠른 걸음으로 도로를 가로질러 마트 쪽으로 사라졌다. 재료가 떨어져 급히 사러 가는 모양이었다. 대학생인 아들도 그 모습을 자주 목격해 그를 ‘무단횡단 형’으로 부르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마트 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그는 벌써 서너 개의 식자재를 사서 또다시 중앙경계선을 넘고 있었다. 예전에 드문드문 알게 된 그에 대한 정보는 코로나 이전에 개업을 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한 직장인 부럽지 않게 돈을 벌고 있었다. 방이 딸린 가게에서 24시간 일을 해 가며 위기를 극복한 뒤 그가 얻은 것은 공황장애였다. 그 때문에 좀처럼 가게 밖으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날 새벽, 작업실을 나와 집으로 올라가려다 지영씨 가게에 들렀다.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어서였다. 이웃인 그녀는 얼마 전에 돼지국밥 전문 배달점을 차렸다. 작업실에 있는 책상에 오렌지색 페인트를 칠해 그녀에게 나눔을 해 주었다. 그 뒤로 나도 종종 그 테이블에 앉아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작업실로 돌아오곤 했다. 그녀는 내 작업실과 그녀의 가게를 번갈아 오가면서도 왠지 작업실에는 선뜻 들어오지 않았다. 무언가 편치 않은 게 있어 보였다.

지영씨 가게에는 시영씨가 이미 와 있었다. 그녀는 제주도에 살다가 영도의 해안선에 반해 부산에 임시 정착한 사람이다. 마라탕집을 준비 중인데 영화를 좋아해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도 빔프로젝터를 챙겨 다녔다. 작업실에서든 지영씨 가게에서든 영화 한 편 보자는 말을 막 끝낼 때였다. 낮에 중앙선을 넘던 그가 어색한 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열려 있어 들어와 보았다는 그에게 지영씨는 소주 한 병과 순대를 썰어 내놓았다.

“우리 아들이 사장님을 무단횡단하는 형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뭐라도 말을 걸어보려고 한 끝에 나온 말이었다.

“아! 진짜요?”

그가 과하지 않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말을 트기 시작해 이야기는 새벽 5시까지 이어졌다. 시영씨는 언젠가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영씨는 아이 둘을 혼자 키워야 해 현재 닥친 일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그는, 좀더 심해진 공황장애 탓에 혼자 심야 산책을 한다고 했다. 동네 구석구석 안 가 본 데가 없다고 했다.

“이제 좀 숨이 쉬어지는데요.”

자리를 파하며 그가 해맑게 웃었다. 혼자 분투하다 서툴게 지영씨 가게에 들른 그에게 작업실에 놀러 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를 숨 쉬게 하는 공간이 어디인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2022-05-18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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