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바티칸 행사 현장 찍어온 원로 사진작가 백남식
비행기는 1천 번도 넘게 탔다. 그동안 가 본 나라만 60개국이 넘는다.수십 년째 교황의 모습과 바티칸의 주요 행사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온 원로 사진작가 백남식(77)은 평생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수십년간 교황사진 찍은 원로 사진작가 백남식
수십 년간 교황의 모습과 바티칸의 주요 행사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온 원로 사진작가 백남식(77). 그는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순교자 24위의 시복식을 촬영한 이후로 줄곧 바티칸의 어제와 오늘을 기록해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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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광화문에서 만난 작가는 “교황이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갔다”고 했다.
”천주교 신자로서 바티칸에 한번 가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던 그가 처음 바티칸에 간 것은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순교자 24위의 시복식. 병인박해 당시 흥선대원군의 박해로 순교한 남종삼 성인의 후손과 함께였다.
당시 서울대교구 김수환 대주교가 시복 미사를 집전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촬영한 것을 계기로 그는 천주교의 주요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물론 카메라와 함께였다.
그러다 1981년 10월18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대하게 치러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담은 사진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보이게 됐다. 1983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의 일반 알현에서다. 80만 명의 신자가 운집한 모습을 담은 그의 사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3년 뒤인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 한국을 방문해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순교자 시성식을 주례할 때도 그는 현장에 있었다.
”100만 명이 모인 모습을 한 장에 담으려면 건물 옥상으로 가야겠더라고요. 여의도 광장 근처 전경련 건물에 갔는데 경호 때문에 전부 문이 닫혀 있었어요. 제가 찍은 사진을 교황에게 헌정하는 장면이 담긴 신문 기사를 경비원에게 보여주면서 꼭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죠. 그러니까 문을 열어주더군요.”
건물 경비원이 “잘못하면 암살범으로 몰릴 수 있다”며 자신의 빨간 유니폼을 빌려준 덕분에 그는 ‘무사히’ 건물 옥상에서 시성식에 운집한 100만 명의 신자를 한 컷에 담았다.
나중에 이 사진을 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양에서 제일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작가는 “이 사진 덕분에 교황의 사랑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백남식에게 베드로 대성전 왼쪽 화랑 브라치오 디 카를로 마그노홀에서 전시를 열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산 사람은 한 번도 전시를 연 적이 없는’ 곳이었다.
작가와 바티칸의 ‘인연’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거쳐 현 프란치스코 교황에까지 이어졌다.
그는 작년 3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 선출 직후 가진 첫 성금요일 예식을 비롯해 지난 3월 열린 염수정 추기경의 서임식 등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뒤 열린 각종 행사에도 어김없이 참석해 현장의 분위기를 담았다.
작년 7월 교황이 세계청년대회가 열리는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에도 그는 브라질에 있었다. 인파가 몰려 밥 먹을 식당을 찾지 못해 아침에 숙소에서 챙긴 빵으로 겨우 끼니를 때워야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스타일이세요. 브라질에서 오픈카를 타고 돌아다닐 때는 한 신자가 빨대를 꽂은 코코넛을 내밀었는데 확인도 없이 그냥 마시셨어요. 독극물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건데 말이죠.”
최근 교황의 중동 순방에도 그는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을 찾아 교황이 베들레헴의 구유 광장에서 집전한 미사 장면을 겨우 담을 수 있었다고 했다.
때로는 외신 사진 기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는 남들이 찾지 않는 높은 곳에서 행사장 전반을 조망하는 사진을 촬영한다. 사진도 꼭 파노라마로 찍는다.
그는 “’평화의 사도’인 교황이 평화를 전하는 현장의 생생한 느낌을 현장에 없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체력은 타고났다”는 그지만 사실 20년 전에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직장암 수술을 받았다. 재수술을 받을 당시 의사는 그에게 “살 확률은 1∼2%”라고 했다. 수술대에 오른 그는 “세상에 필요한 도구가 되게 하려면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그는 1시간 남짓한 인터뷰 내내 ‘평화’라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작가는 “6·25 때 인민군에 의해 아버지가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평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1989년 호주로 이민 갔다가 작년 말 귀국한 작가는 지난 1995년 호주 내 이산가족을 따라 방북해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북한 노동당의 허가를 받아 금강산을 촬영했다. 이후에도 북한에 30여 차례 방북해 묘향산과 백두산 등의 풍경을 담은 그는 1998년과 2000년 평양에서 사진전을 열고 ‘로력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사진을 유엔에서 전시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고향인 전북 익산의 나바위 성지 인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사진 박물관을 만들 계획도 갖고 있다. 익산 나바위 성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내디딘 곳이기도 하다.
그가 담은 교황과 바티칸의 모습은 오는 18일까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전시장에서 열리는 특별 사진전 ‘헬로, 프란치스코!’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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