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인의 삶’처럼… 그들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
‘9월 파란색 달이 뜬 바로 그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말없이/난 그곳에서 창백한 내사랑, 그녀를 품안에 안았다 달콤한 꿈처럼/우리 머리 위 아름다운 여름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 떠 있었다. 그 구름을 나는 오랫동안 쳐다보았다/구름은 아주 하얗고 아득히 높아/내가 다시 올려다보았을 땐 사라지고 없었다.…(중략) 키스도, 구름이 거기 떠있지 않았더라면/벌써 오래 전에 잊어 버렸을 것이다.’
영화 ‘타인의 삶’(플로리안 헨켈 폰 돈너스마르크 감독. 2006년作)에서 동독 비밀경찰 비즐러(울리히 뮈헤)의 굳센 신념을 흔들리게 한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 ‘마리아의 추억’의 일부다.
사람을 지칠 때까지 심문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비즐러. 도청이란 직업을 통해 사회주의 적들과 맞서야 한다는 굳센 신념을 지닌 인물이다.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제바스티안 코흐)과 그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를 감시하는 중대 임무를 맡는다. 그는 모든 걸 기록한다. 민감한 대화, 은밀한 사생활까지. 그러나 그의 굳센 신념을 흔들리게 만든 서막은 브레히트 시 ‘마리아의 추억’이다.
드라이만의 집에서 그는 노란색 브레히트의 시집을 갖고 나온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난생 처음 문학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가 도청하는 삶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인간적인 모습이 조금씩 투영되며 인간성을 서서히 찾아가기 시작한다. 도청장치 너머로 타인의 삶을 기록하던 그의 인생에 변화가 온다. 아니 어쩌면 영화 포스터처럼 ‘난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 훔친 삶이 그의 삶이었는지 모른다. 우린 가끔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난 뒤 주인공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타인의 삶’은 바로 그런 영화다.
#브레히트의 시처럼… 구름이 아주 하얗고 아득히 높은 그런 날
내 임시 거처인 도두항 동쪽 끝에서 늘 아른거리는 사라봉으로 향하는 날은 브레히트의 詩 처럼 모처럼 ‘구름은 아주 하얗고 아득히 높은’ 그런 날이었다.
고운 비단을 뜻하는 사라봉(건입동 387-1)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주십경 중 사봉낙조의 장관을 만날 수 있는 오름이다. 해질녘의 햇빛에 비친 산능성이가 마치 황색비단을 덮은 듯 하단다. 그래서 사봉낙조는 사라봉에서 지는 붉은 노을을 뜻한단다.
일주일 두세번은 저녁마다 이곳을 산책한다는 OO일보 오 기자는 “노을로 붉게 물든 바다 끝에 선배가 사는 도두봉이 보인다”며 말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처음 제주도청을 출입할 때 가장 먼저 안면을 튼 기자로 이후 우린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청 기자실 출근도장을 제일 먼저 찍는 사이가 됐다. 그는 잡다한 지식의 소유자다. 간혹 DNA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신기한 건 제주사람들도 잘 모르는, 제주의 속살을 궁금해하면 네이버 지식검색창에도 없는 얘기를 줄줄 풀어놓는다. 마을유래를 잘 아는 동네어른한테 얘기 듣는 기분이다. 진짜인가 의심이 들 때도 있지만 대부분 거의 맞다.
그가 알려준대로 국립제주박물관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장맛비가 내려서인지 초록세상속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잘 꾸며진 도심공원의 돌계단이 유난히 매끄러워 보인다. 레트로풍 영화에서 보던 일본식 정원을 닮았다고 느꼈다. 올레길 18코스를 알리는 길안내 리본을 만나는 초입에서부터 사라봉 일제동굴진지와 마주한다. 이 시설물은 일본군이 제주 북부 해안으로 상륙하는 연합군을 1차 저지하고 제주 동비행장(진드르 비행장)과 서비행장(정뜨르 비행장. 제주국제공항)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했단다.
멋드러진 솔나무 오솔길 정상 언저리엔 체력단련시설과 팔각정이 손짓한다. 제주시내 오름 중 이보다 잘 정비된 오름이 또 있을까. 시가지 중심에서 2㎞쯤 떨어진 해안에 자리잡은 사라봉 팔각정에서 관덕정 인근 김밥맛집에서 사들고 온 사각김밥 도시락을 눈깜짝할새 헤치웠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그제서야 솔잎 너머로 구름에 가린 한라산, 푸른바다와 함께 제주시내가 눈에 밟힌다. 비록 해발 148m에 불과한 봉우리지만 탑동 너머 공항 활주로, 멀리 도두봉까지 눈에 잡혔다. 낙조를 보기 위해 가을 저녁무렵에 다시 한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은 햇살 한줌마저 털어내고 싶은 여름이다.
#사라봉과 별도봉처럼… 가까이에 있지만 속살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사이
동쪽 시멘트 길을 한참 내려오면 형제봉처럼 붙어있는 별도봉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초입이 나온다. 약수터 앞 사라봉 해송숲도 보인다.
마치 탑골공원 어르신들처럼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마치 나란히 자리잡은 사라봉과 별도봉 같은 사이처럼 보인다. 날마다 만나는 짝꿍같은 사이지만, 약간 거리감이 있는 그런 애매한 사이, 친근감은 있으나 속살을 드러내보이지 않는 사이, 사는 방식과 사회적 위치는 다르지만 묘한 동질감에 연대의식같은 감정이 싹튼 사이.
알고보면 서먹서먹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외면하고 가던 길을 갈 정도로 데면데면한 사이도 아닌 사람들, 잠깐 어울려 앉아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침부터 계속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동시에 물끄러미 바라본 사이, 같은 하늘에 같은 시선으로 멈춘 사이, 전화번호를 교환하진 않지만 사실은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하는 사이 같았다. 아마도 제주시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 사라봉 공원이 때론 만남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사라봉과 별도봉은 그런 사이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토끼가 많이 산다는데 이날은 토끼를 보지 못하고 별도봉으로 접어들었다. 별도봉정수장 왼편으로 5분여 걸어가면 바로 정상이 나온다. 제주항도 보인다.
화북악, 베리(벨·절벽 제주어)오름이라고도 한다는 별도봉(화북1동 4472)은 쇄설성(碎屑性) 퇴적암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생 화산이다. 사실 사라봉의 낙조가 보고 싶어왔다가 별도봉의 장수산책로에 반해 돌아갈 지도 모른다. 그만큼 산책로가 아름답다.
#애기업은 돌처럼… 누군가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돌로 굳어버린
특히 ‘애기업은 돌’ 아래로 펼쳐지는 해안선과 제주항 부두가 눈부시다. 바다와 접하는 북쪽의 모습은 칼로 절단한 것처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다. 아찔하다. 별도봉(別刀峯)의 의미가 인간의 인연을 맺은 정을 칼처럼 자르듯 이별 한다는 뜻이어서 더욱 아찔하다. 옛날 제주에 부임한 관료나 귀향온 자들이 제주에 남겨놓은 가족과 생이별을 고했다는 말에 더욱 멀미가 난다. 애기업은 돌의 설화는 그래서 탄생된 것이리라. 고기를 잡으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석의 전설처럼 애기를 업고 바다를 향해 서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돌로 굳어진….
또다른 얘기를 들어보면 삼양동 쪽에서 바라보면 여인이 아기를 업고 산 위로 올라가는 모양이어서 예부터 삼양 여인들은 멀리 시집을 가거나 화북에 시집을 오면 이혼하는 사람이 많고 시집살이가 잘되지 않는다고 해 어느 날 밤에 삼양의 장정들이 이 애기 업은 돌을 허물려고 했지만 물거품이 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지금 그 바위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담쟁이 등 넝쿨식물들로 온몸을 휘감아 털북숭이 킹콩처럼 변해 있었다.
애기업은 돌 아래로 내려와 벤치에 앉아 있으면 제주항터미널에 정박한 크루즈선과 육지를 오가는 카페리호마저 이국적이다. 브레히트가 별도봉을 찾았다면 그가 ‘사랑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또 물었을까.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남겼을까.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위로와 용기를 얻는 국립제주박물관의 ‘이건희 컬렉션’
‘모든 변화는 ‘나로부터의 변화’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동심원의 파문이 처음에는 작지만 점점 커져 호수 전체로 확산돼 나가는 것 처럼 모든 변화의 원점에는 나부터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이건희 에세이중에서)
이 글을 음미하며 아주 천천히 돌아보련다. 사라봉 동남쪽 국립제주박물관에는 이건희컬렉션이 한창이다. 지난 6월 4일 선보인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특별전’은 최근 관람객 5만명을 돌파했단다. 8월 18일까지 열린다.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한번쯤 찾아보길 권유하고 싶다.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한 전시회가 아니던가. 이 특별전에는 187건 360점이 선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 16일부터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를 비롯한 서화 작품 전체인 38점을 전면 교체하여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빛과 온·습도에 민감한 서화 작품 보호를 위해서란다.
27점에 달하는 병풍, 액자, 족자를 새로운 작품으로 바꾸어 전시하며, 11점의 화첩과 사경은 펼치는 면을 바꾸어 전시하고 있다.
‘천수관음보살도’를 대신해 새롭게 선보이는 ‘수월관음도’는 고려불화의 섬세한 미감과 깊은 종교적 울림을 전해준다 ‘수월관음도’는 하늘에 달은 하나이지만 물에 비친 달은 수없이 많은 것처럼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며 끝없는 자비로 중생을 구원하는 수월관음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수월관음도’ 옆에 비치한 터치모니터로 적외선으로 본 선명한 밑그림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제2부 ‘수집가의 몰입’에서는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10폭 병풍 ‘꽃, 새와 짐승’,를 만날 수 있다.. ‘꽃, 새와 짐승’은 담채로 단번에 그려낸 잎새와 세밀한 붓질로 채색한 동물이 시각적으로 어우러진 걸작으로, 장승업의 거침없는 필력을 느낄 수 있다.
고 이건희 회장의 부친인 고 이병철 회장의 호암자전에는 ‘오랜 세월에 바랜 서화와 도자기는 때론 침묵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위로와 용기를, 들떠 있을 때는 자제를 던져주곤 한다’고 적혀 있다.
마음이 울적해지는 날이면, 미술관을 찾지 않는 사람도 범종을 만나고, 백자 달항아리의 여백을 만나면 위로와 용기란 친구를 만날 지 모른다.
사라봉 정상 솔밭에서 바라본 서쪽 바다의 모습. 멀리 도두봉이 눈썹크기만하게 바다에 걸려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별도봉에서 바라본 사라봉. 제주 강동삼 기자
영화 ‘타인의 삶’(플로리안 헨켈 폰 돈너스마르크 감독. 2006년作)에서 동독 비밀경찰 비즐러(울리히 뮈헤)의 굳센 신념을 흔들리게 한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 ‘마리아의 추억’의 일부다.
사람을 지칠 때까지 심문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하는 비즐러. 도청이란 직업을 통해 사회주의 적들과 맞서야 한다는 굳센 신념을 지닌 인물이다.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제바스티안 코흐)과 그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를 감시하는 중대 임무를 맡는다. 그는 모든 걸 기록한다. 민감한 대화, 은밀한 사생활까지. 그러나 그의 굳센 신념을 흔들리게 만든 서막은 브레히트 시 ‘마리아의 추억’이다.
드라이만의 집에서 그는 노란색 브레히트의 시집을 갖고 나온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난생 처음 문학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가 도청하는 삶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인간적인 모습이 조금씩 투영되며 인간성을 서서히 찾아가기 시작한다. 도청장치 너머로 타인의 삶을 기록하던 그의 인생에 변화가 온다. 아니 어쩌면 영화 포스터처럼 ‘난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 훔친 삶이 그의 삶이었는지 모른다. 우린 가끔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난 뒤 주인공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타인의 삶’은 바로 그런 영화다.
잘 가꿔진 정원같은 사라봉 오름. 제주 강동삼 기자
사라봉 팔각정 정자. 제주 강동삼 기자
소나무숲 사이로 사라봉 정상 팔각정이 보인다. 제주 강동삼 기자
#브레히트의 시처럼… 구름이 아주 하얗고 아득히 높은 그런 날
<36>가깝고도 먼 사라봉과 별도봉
고운 비단을 뜻하는 사라봉(건입동 387-1)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주십경 중 사봉낙조의 장관을 만날 수 있는 오름이다. 해질녘의 햇빛에 비친 산능성이가 마치 황색비단을 덮은 듯 하단다. 그래서 사봉낙조는 사라봉에서 지는 붉은 노을을 뜻한단다.
일주일 두세번은 저녁마다 이곳을 산책한다는 OO일보 오 기자는 “노을로 붉게 물든 바다 끝에 선배가 사는 도두봉이 보인다”며 말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처음 제주도청을 출입할 때 가장 먼저 안면을 튼 기자로 이후 우린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청 기자실 출근도장을 제일 먼저 찍는 사이가 됐다. 그는 잡다한 지식의 소유자다. 간혹 DNA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신기한 건 제주사람들도 잘 모르는, 제주의 속살을 궁금해하면 네이버 지식검색창에도 없는 얘기를 줄줄 풀어놓는다. 마을유래를 잘 아는 동네어른한테 얘기 듣는 기분이다. 진짜인가 의심이 들 때도 있지만 대부분 거의 맞다.
그가 알려준대로 국립제주박물관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장맛비가 내려서인지 초록세상속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잘 꾸며진 도심공원의 돌계단이 유난히 매끄러워 보인다. 레트로풍 영화에서 보던 일본식 정원을 닮았다고 느꼈다. 올레길 18코스를 알리는 길안내 리본을 만나는 초입에서부터 사라봉 일제동굴진지와 마주한다. 이 시설물은 일본군이 제주 북부 해안으로 상륙하는 연합군을 1차 저지하고 제주 동비행장(진드르 비행장)과 서비행장(정뜨르 비행장. 제주국제공항)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했단다.
멋드러진 솔나무 오솔길 정상 언저리엔 체력단련시설과 팔각정이 손짓한다. 제주시내 오름 중 이보다 잘 정비된 오름이 또 있을까. 시가지 중심에서 2㎞쯤 떨어진 해안에 자리잡은 사라봉 팔각정에서 관덕정 인근 김밥맛집에서 사들고 온 사각김밥 도시락을 눈깜짝할새 헤치웠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 그제서야 솔잎 너머로 구름에 가린 한라산, 푸른바다와 함께 제주시내가 눈에 밟힌다. 비록 해발 148m에 불과한 봉우리지만 탑동 너머 공항 활주로, 멀리 도두봉까지 눈에 잡혔다. 낙조를 보기 위해 가을 저녁무렵에 다시 한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은 햇살 한줌마저 털어내고 싶은 여름이다.
사라봉 초입에서 만나는 일제동굴진지. 제주 강동삼 기자
사라봉 정상에서 내려오면 별도봉으로 이어지는 공원 초입에 있는 약수터. 제주 강동삼 기자
별도봉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북쪽 제주항 바다 풍경. 제주 강동삼 기자
#사라봉과 별도봉처럼… 가까이에 있지만 속살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사이
별도봉 애기업은 돌로 가는 둘레길. 제주 강동삼 기자
별도봉의 애기업은 돌. 제주 강동삼 기자
마치 탑골공원 어르신들처럼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들은 마치 나란히 자리잡은 사라봉과 별도봉 같은 사이처럼 보인다. 날마다 만나는 짝꿍같은 사이지만, 약간 거리감이 있는 그런 애매한 사이, 친근감은 있으나 속살을 드러내보이지 않는 사이, 사는 방식과 사회적 위치는 다르지만 묘한 동질감에 연대의식같은 감정이 싹튼 사이.
알고보면 서먹서먹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외면하고 가던 길을 갈 정도로 데면데면한 사이도 아닌 사람들, 잠깐 어울려 앉아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침부터 계속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동시에 물끄러미 바라본 사이, 같은 하늘에 같은 시선으로 멈춘 사이, 전화번호를 교환하진 않지만 사실은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하는 사이 같았다. 아마도 제주시 동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 사라봉 공원이 때론 만남의 장소인지도 모른다. 사라봉과 별도봉은 그런 사이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토끼가 많이 산다는데 이날은 토끼를 보지 못하고 별도봉으로 접어들었다. 별도봉정수장 왼편으로 5분여 걸어가면 바로 정상이 나온다. 제주항도 보인다.
화북악, 베리(벨·절벽 제주어)오름이라고도 한다는 별도봉(화북1동 4472)은 쇄설성(碎屑性) 퇴적암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생 화산이다. 사실 사라봉의 낙조가 보고 싶어왔다가 별도봉의 장수산책로에 반해 돌아갈 지도 모른다. 그만큼 산책로가 아름답다.
담쟁이 등 넝쿨식물 옷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는 애기 업은 돌. 제주 강동삼 기자
#애기업은 돌처럼… 누군가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돌로 굳어버린
별도봉 북쪽에서 바라본 제주항 일대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또다른 얘기를 들어보면 삼양동 쪽에서 바라보면 여인이 아기를 업고 산 위로 올라가는 모양이어서 예부터 삼양 여인들은 멀리 시집을 가거나 화북에 시집을 오면 이혼하는 사람이 많고 시집살이가 잘되지 않는다고 해 어느 날 밤에 삼양의 장정들이 이 애기 업은 돌을 허물려고 했지만 물거품이 됐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지금 그 바위는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담쟁이 등 넝쿨식물들로 온몸을 휘감아 털북숭이 킹콩처럼 변해 있었다.
애기업은 돌 아래로 내려와 벤치에 앉아 있으면 제주항터미널에 정박한 크루즈선과 육지를 오가는 카페리호마저 이국적이다. 브레히트가 별도봉을 찾았다면 그가 ‘사랑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또 물었을까. 아니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남겼을까.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별도봉 장수산책로에서 만나는 제주항 제주 강동삼 기자
영주십경에 속하는 사봉낙조의 모습. 제주관광공사 제공
#잠깐 여기서 쉬었다 갈래… 위로와 용기를 얻는 국립제주박물관의 ‘이건희 컬렉션’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화산석으로 만든 제주 동자석과 문인석 55점을 국립제주박물관 옥외정원에서 선보이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어느 수집가의 초대- 고 이건희 회장 기증 특별전에 전시된 고려시대의 범종(왼쪽)과 천수관음보살도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이 글을 음미하며 아주 천천히 돌아보련다. 사라봉 동남쪽 국립제주박물관에는 이건희컬렉션이 한창이다. 지난 6월 4일 선보인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 이건희 회장 기증 특별전’은 최근 관람객 5만명을 돌파했단다. 8월 18일까지 열린다.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한번쯤 찾아보길 권유하고 싶다.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한 전시회가 아니던가. 이 특별전에는 187건 360점이 선보이고 있다.
특히 지난 16일부터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를 비롯한 서화 작품 전체인 38점을 전면 교체하여 새롭게 선보이고 있다. 빛과 온·습도에 민감한 서화 작품 보호를 위해서란다.
27점에 달하는 병풍, 액자, 족자를 새로운 작품으로 바꾸어 전시하며, 11점의 화첩과 사경은 펼치는 면을 바꾸어 전시하고 있다.
‘천수관음보살도’를 대신해 새롭게 선보이는 ‘수월관음도’는 고려불화의 섬세한 미감과 깊은 종교적 울림을 전해준다 ‘수월관음도’는 하늘에 달은 하나이지만 물에 비친 달은 수없이 많은 것처럼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며 끝없는 자비로 중생을 구원하는 수월관음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이다. ‘수월관음도’ 옆에 비치한 터치모니터로 적외선으로 본 선명한 밑그림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제2부 ‘수집가의 몰입’에서는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10폭 병풍 ‘꽃, 새와 짐승’,를 만날 수 있다.. ‘꽃, 새와 짐승’은 담채로 단번에 그려낸 잎새와 세밀한 붓질로 채색한 동물이 시각적으로 어우러진 걸작으로, 장승업의 거침없는 필력을 느낄 수 있다.
고 이건희 회장의 부친인 고 이병철 회장의 호암자전에는 ‘오랜 세월에 바랜 서화와 도자기는 때론 침묵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위로와 용기를, 들떠 있을 때는 자제를 던져주곤 한다’고 적혀 있다.
마음이 울적해지는 날이면, 미술관을 찾지 않는 사람도 범종을 만나고, 백자 달항아리의 여백을 만나면 위로와 용기란 친구를 만날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