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노숙인·불체자…범죄표적된 또다른 ‘약자’

취준생·노숙인·불체자…범죄표적된 또다른 ‘약자’

입력 2015-11-08 10:58
수정 2015-11-08 10:58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절박함·약점 이용한 사기·보이스피싱 등 기승

#1. 민모(78)씨와 배모(54)씨는 2012년부터 기가 막힌 사기극을 벌였다. 정부가 국방 비리를 개혁할 민영재단을 만들려 하는데 등록비를 내면 7급 군무원으로 채용하겠다거나, 국방부 산하 비밀 조직에 군무원으로 취직시켜주겠다는 등 ‘감언이설’로 공무원을 희망하는 취업준비생을 꼬드겼다.

중간 모집책까지 갖추고 범행을 시작한 이들에게 공무원 취업의 높은 벽을 절감해온 청년 구직자들이 몰렸다. 공무원 자리에 혹해 3천700만원을 건넨 이도 있었다. 민씨와 배씨 일당이 경찰에 붙잡히기까지 사기극에 넘어간 피해자는 340여명. 피해액은 무려 45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2. 한모(57)씨의 별명은 ‘부산역 대통령’이었다. 걸핏하면 부산역 일대의 노숙인을 폭행하며 실력자로 군림했다.

그의 범행은 폭행에 그치지 않았다. “선원으로 일하면 한 달에 200만∼300만원을 벌 수 있다”고 노숙인들을 꾀었다. 2013년 6월부터 2년간 한씨의 말에 넘어간 노숙인은 8명. 이들은 전남 목포, 전북 군산 등지의 새우·멸치잡이 선박의 선원으로 취업했지만, 하루 16시간 이상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배를 탄 경우도 있었다.

정신지체 3급인 한 피해자는 1개월 반 정도 군산의 새우잡이 어선을 타고도 일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선주 박모(58)씨에게 오히려 100만원을 뜯기고, 염전에 팔려갈 뻔하다 경찰에 구출됐다.

#3. 불법체류 상태인 조선족 여성 황모(53)씨는 6개월 전 평소 잘 아는 조선족 A씨의 연락을 받았다. 건축 자재를 거래하는데 함께 가서 가격 흥정을 하며 바람을 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황씨가 A씨와 함께 나간 거래 장소에는 A씨가 다닌다는 건설회사 사장이자 역시 조선족인 문모(62)씨와 건축자재 판매자가 있었고, 건축용 금강석과 5만원권 지폐 다발이 담긴 가방도 등장했다.

한창 거래가 이어지다 황씨는 A씨로부터 “판매자가 예상보다 물량을 많이 가져와 돈이 모자란다. 좀 빌려주면 이자를 많이 쳐주겠다”는 부탁을 받았다. 황씨는 거액의 돈 가방과 금강석 샘플에 의심 없이 900만원을 찾아 건넸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모두 잠적해버렸고, 황씨는 어렵게 모든 목돈을 한순간에 날렸다. 경기 의정부 경찰서가 문씨를 잡아 조사해보니 돈 가방 속 5만원권은 모두 가짜였고, 금강석도 단순한 실리콘이었다. 경찰은 문씨 일당이 황씨가 강제출국 당할 것을 우려해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악용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여성이나 노인, 아동 등 전통적인 범죄 취약층과는 달리, 사회·경제적 여건과 환경이 급속히 변하면서 사회적 약자로 내몰린 이들이 각종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

최악의 청년 취업난 속에 암울한 미래에 떠는 취업 준비생이나 갈 곳 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근근이 연명하는 노숙인이 그들이다.

언제 강제출국 당할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 생활을 이어가는 조선족 등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주변 도움 없이는 생활이 어려운 발달·지체 장애인, 돈을 빌리고 싶어도 능력이 없는 신용불량자 등도 범죄에 노출되는 빈도가 늘고 있다.

8일 경찰에 따르면 이들이 당하는 범죄는 주로 사기나 보이스피싱, 불법 사금융 등이다. 피해자들의 절박한 사정을 이용한 범죄가 통하는 것이다.

서울의 한 경찰서 수사과장은 “장애인이나 취업준비생 등을 대상으로 한 범행이 많이 일어난다는 느낌은 확실히 든다”며 “사회가 어려우니 그런 약자들이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 것 같다. 범행에 이용되기도 하고 얼마 받지도 못하면서 범행에 가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찰서 수사과장은 “조선족 단체가 조선족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환경미화원을 시켜주겠다며 노인을 등친 구청 공무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범죄는 잊을 만하면 하나씩 터진다”고 전했다.

이들처럼 사회 변화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한 범죄 발생이나 경찰의 검거 소식이 수시로 언론을 타고 있지만 뾰족한 예방 대책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나마 불법체류 외국인이 범죄 피해를 신고할 경우 경찰이 불법체류 사실을 출입국사무소로 통보하지 않아도 되는 ‘통보의무 면제제도’가 있지만, 이 또한 적극적인 홍보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에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 통계도 관리되지 않고 있다. 피해자 신분이나 직업, 연령, 계층, 피해 사례 등이 제각각이어서 통계로 수치화하기가 어렵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하지만 사회 변화가 더욱 급속하게 이뤄지는 상황에서 새로운 유형의 약자들이 계속 나올 수밖에 없는 만큼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당신은 하루에 SNS와 OTT에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는가
우리 국민의 평균 수면 시간이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줄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의 비율도 크게 늘었다. 반면 유튜브와 넷플릭스 등의 이용자가 늘면서 미디어 이용 시간은 급증했다. 결국 SNS와 OTT를 때문에 평균수면시간도 줄었다는 분석이다. 당신은 하루에 SNS와 OTT에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는가?
1시간 미만
1시간~2시간
2시간 이상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