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수사에서 2심까지
18대 대선을 8일 앞둔 2012년 12월 11일 오후. 민주통합당 일부 의원과 당직자들이 ‘제보’를 받고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을 급습했다. 문은 잠겨 있었고 민주당은 경찰과 선거관리위원회, 언론사 등에 “국가정보원 직원이 인터넷 댓글 등을 통해 대선에 개입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오피스텔은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의 숙소였다. 양측의 대치는 40여 시간이나 계속됐다.
대선 과정에 국가 정보기관이 개입한 정황이 폭로되면서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됐다. 여권에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국민 관심은 수사를 맡은 서울 수서경찰서로 쏠렸다. 경찰은 사건 발생 6일째인 16일 밤 11시 예고 없이 이례적으로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대선 후보 마지막 TV 토론이 끝난 직후였다. 경찰은 “국정원 직원의 PC와 노트북 등에서 대선 개입 정황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일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사건은 수사를 지휘했던 권은희(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당시 수서서 수사과장의 ‘수사 축소·은폐 외압’ 폭로로 재점화됐다. 김용판 당시 서울경찰청장이 수사를 방해하고 허위 내용을 담은 결과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측은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4월 김 전 청장과 함께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국정원법 위반 혐의 등으로 고발했다.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서울중앙지검에 ‘특별수사팀’ 구성을 지시했고, 윤석열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과 박형철 공공형사수사부장을 각각 팀장과 부팀장으로 임명해 수사에 착수했다.
국정원과 현 정권을 향한 수사는 험난했다. 6월 초 수사팀이 원 전 원장에게 국정원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하려는데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적극 반대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채 총장이 정권에 밉보였다는 말도 함께 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검찰은 결국 6월 14일 원 전 원장을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같은 해 9월 6일 혼외 아들 의혹이 확산되면서 결국 채 총장은 검찰을 떠나게 됐다.
이후에도 검찰의 내분은 이어졌다. 수사 과정에서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의 외압이 있었다는 윤 팀장의 폭로에 따라 조 지검장도 사퇴했다. 윤 팀장과 박 부팀장은 ‘직무상 의무 위반’을 이유로 감봉 징계를 받고 좌천성 전보를 당했다.
지난해 9월 11일 열린 원 전 원장에 대한 1심 선고공판은 수사팀으로선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당시 검찰은 공소장에 국정원이 선거 관련 글 1057건에 찬성·반대 의견을 클릭해 특정 후보 당선과 낙선을 유도했다고 봤다. 또 국정원 직원이 직접 114건의 대선 관련 게시물이나 댓글을 썼고 트위터에서 선거 관련 글 44만 6844건을 쓰거나 퍼 나른 것으로 봤다. 하지만 1심은 모두 “목적성 입증이 부족하다”며 선거 개입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결정된 2012년 8월 20일 이후의 온라인 활동 상당수를 선거 개입이라고 판단해 1심 판결을 뒤집었다. 1심과 2심의 엇갈린 판결 때문에 최종심인 대법원 상고심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국정원 대선 개입 실태…“박근혜 후보 후원하면 대선 승리 큰 힘”
“문재인 당선 땐 낮은 연방제-적화통일”
“박근혜 후보 후원 계좌 안내. 대선 승리로 가는 큰 힘이 됩니다. ARS 후원 전화(1통화에 3000원) 060-700-2013.”
검찰이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대선 개입 증거로 제출한 국정원 직원의 트위터 글 가운데 하나다. 검찰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 관련자들을 기소하면서 트위터와 ‘오늘의 유머’ 등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국정원 직원 게시글 가운데 상당수가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둔 시기에 집중됐다고 밝혔다.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에게는 우호적인 글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에게는 비방하는 내용이 집중됐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따르면 2012년 10월 28일 국정원의 한 직원은 “오늘도 기분 좋게 5통화 했어요~♬ 박근혜 후보 후원 계좌 안내 대선 승리로 가는 큰 힘이 됩니다. ARS 후원 전화 060-700-2013 여러 통화 해도 됩니다”라고 썼다. 비슷한 시기에 국정원 직원이 재전송한 트윗 글에는 “박근혜가 신뢰받는 이유…저는 세종시 발언에서 나온 그때의 그 짜릿한 국회 발언이 컸다고. 그런 소신이 있으니 지금까지 온 거고요”라고 적혀 있다. 또 11월 21일 국정원 직원이 직접 쓴 “편하게 살 수도 있을 텐데 오로지 국민과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개인의 모든 걸 버리고 희생하는 박근혜 후보를 밀어주셔야 합니다. 박근혜 후보 악수 통증 고백 ‘손 잡히기보단 잡는 게 덜 아파’”라는 글 등도 당시 박 후보 당선을 목적으로 작성됐다고 검찰은 판단했다.
반면 문 후보에 관해서는 “종북 문재인이 당선되면 낮은 연방제-적화통일(공산화)을 이루려고 할 것입니다. 자유월남이 적화통일되었을 때처럼 재산 몰수, 자유·인권 탄압, 학살되거나 정신수용소에 가거나 보트피플이 될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또 일간베스트(일베) 등에는 문 후보를 겨냥해 “좌좀들이 선거철만 되면 떠드는 것 중에 하나가 보편적 복지로 국민들의 표심을 자극하는 것일 게다” 등의 글을 집중적으로 올렸다. ‘좌좀’은 일베 등에서 진보 성향 사람들을 비하할 때 쓰는 ‘좌파좀비’의 줄임말이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원세훈 출소 5개월 만에 재수감 ‘수모’
9일 오후 서울고법 312호 중법정.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실형이 선고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감색 정장에 푸른색 넥타이 차림으로 법정에 나와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판결을 경청하던 그는 “저로서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한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재판부가 법정을 떠나자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난 원 전 원장의 얼굴은 붉게 상기돼 있었다. 법원 직원이 내민 구속영장 발부 서류에 서명하는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입고 온 외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허둥대기도 했다.
법정에 흩어져 있던 방호원 10여명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방청석 앞에 일렬로 줄을 짓고 방청객이 원 전 원장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예상과 달리 법정은 크게 소란스럽지 않았다. 재판 결과에 실망한 보수단체 회원들은 일찍 법정을 빠져나갔다.
원 전 원장은 재판 시간에 맞춰 법원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해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원 전 원장 측 변호인은 선고 뒤 “1심에서 무죄로 본 선거법 위반 부분을 유죄로 본 것이 가장 아쉽다”며 “판결문을 검토한 후 잘못이 있다면 바로잡을 수 있게 준비하겠다”고 상고 의사를 밝혔다.
원 전 원장이 개인 비리로 징역형을 살다가 만기 출소한 뒤 불과 5개월 만에 다시 법정구속됨에 따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과의 엇갈린 운명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김 전 청장은 국정원 댓글 수사에 외압을 행사한 혐의로 기소됐으나 1심에서 항소심까지 거푸 무죄가 나온 데 이어 지난달 말 상고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원 전 원장은 직접 선거에 개입했고, 김 전 청장은 그 부분에 대한 수사를 축소했다는 혐의여서 완전히 별개의 사안이다.
한편 댓글 수사와 관련해 김 전 청장의 외압 의혹을 폭로한 권은희(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전 서울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이후 야권의 러브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됐으나 거짓 진술 및 증언을 한 혐의 등으로 보수단체로부터 고발당해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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