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그림자’손 글씨’ 못 쓰는 젊은 세대

디지털 시대의 그림자’손 글씨’ 못 쓰는 젊은 세대

입력 2015-10-08 07:25
수정 2015-10-08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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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스마트폰이 소통 지배…손글씨 쓸 상황에서 ‘당황’전문가들 “풍부한 손 글씨는 활자 문화의 토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지 569년이 지난 2015년. 컴퓨터와 스마트 기기 등 디지털 장비가 필기구를 대체하면서 한글이라는 문자를 사용하는 일상의 풍경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연필이나 펜으로 종이에 직접 손 글씨를 쓰는 일은 갈수록 드물어진다. 어딜 가도 문서 기안부터 내용 작성까지 컴퓨터 자판과 마우스로 대부분 해결한다. 학교의 칠판도 대형 스크린이나 프로젝터로 급속히 대체되고 있다.

이런 탓에 필요할 때 손 글씨를 쓰는 일 자체를 어려워하는 젊은이들까지 나오고 있다. 한글을 몰라 글씨를 못 쓰는 것이 아니라, 평소 워낙 손 글씨를 쓸 일이 없다 보니 정작 제대로 글씨를 써야 할 상황이 되면 손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손 글씨가 일상 언어활동의 한 수단일 뿐 아니라 한글이라는 문자를 토대로 한 활자 문화를 풍성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지적한다. 다양한 손 글씨체가 많은 사회일수록 이를 활용한 서체들과 그를 발판으로 한 다채로운 문화가 발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 판서 안 되는 교사…손 글씨 연습하는 취준생

손 글씨 쓰기를 업으로 삼는 대표적 직종은 칠판을 사용해야 하는 교사다. 그러나 젊은 교사 중에는 평소 손으로 글씨 쓸 일이 별로 없다 보니 칠판에 수업 내용을 적는 판서조차 어려워하는 이들도 있다.

5년차 초등학교 교사 김모(27·여)씨는 수업 중 칠판에 판서가 제대로 안 돼 고민이다. 수업 중 대부분 컴퓨터를 활용하기에 판서할 일이 별로 없지만, 어쩌다 꼭 판서가 필요하면 난감하기만 하다.

김씨는 “몇 년 전 공개수업을 했더니 ‘다 좋은데 판서 연습 좀 했으면 좋겠다’는 지적이 나와 민망했다”며 “몇 년을 연습해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진 수준인데, 나이가 많고 판서를 오래 한 선생님들은 확실히 잘 쓰시더라”고 말했다.

입사 전형에서 논술 등 글쓰기를 요구하는 직장에 가려면 정갈한 손 글씨는 필수다. 일부 취업준비생은 평소 컴퓨터 자판이나 휴대전화만 다루다 정작 시험장에서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취업준비생 최모(28)씨는 심각한 악필이다. 희망하는 직종의 입사시험에 손 글씨로 답안을 길게 써 내야 하는 과목이 있지만, 평소 글쓰기 연습을 하노라면 자신이 쓴 글조차 스스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최씨는 “자판 치기에만 익숙한 상태에서 자신 있게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크게 당황해 나중에는 손에서 힘이 풀려 답안을 다 쓰지도 못한 적이 있다”며 “시험 결과에 글씨체도 중요하다는 조언을 듣고 글씨쓰기 교본까지 사 연습 중”이라고 말했다.

회사원 최모(23·여)씨는 최근 남자친구 생일에 손 편지를 써주려다 한참 애를 먹었다. 일할 때는 컴퓨터 자판만 쓰고, 남들과 소통은 휴대전화나 전화로만 하다 오랜만에 손 글씨를 쓰려니 글씨체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최씨는 “편지를 쓰다 글씨가 마음에 안 들어 편지지 여러 장을 버린 끝에 겨우 편지를 완성했다”면서 “회사에서도 모든 일을 컴퓨터 문서로 처리하니 내가 악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 “풍부한 손글씨는 한글 활자 문화의 풍성함 더해”

손 글씨의 쇠퇴는 일상을 불편하게 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오늘날 출판이나 디지털 매체에서 사용되는 폰트(글꼴) 가운데 손 글씨체에서 유래한 것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손 글씨가 활자 문화의 중요한 토대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일례로 가장 널리 쓰이는 한글 서체인 명조체도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의 붓글씨체에 뿌리를 뒀다. 붓글씨체를 출판 등 용도에 맞게 정돈하고 보완해 개발한 폰트가 오늘날의 명조체다.

영문 서체로 널리 쓰이는 ‘타임스 뉴 로먼’(Times New Roman), 개러몬드(Garamond) 등도 손 글씨체에 뿌리를 둔 활자 글꼴로 알려졌다.

디지털 폰트 개발자인 홍기익 DX코리아 대표는 “오늘날에는 웹·모바일용 폰트 수요가 늘어나면서 훨씬 다양한 한글 폰트가 필요한 상황”이라며 “손 글씨체가 풍부하면 이를 이용해 여러 영역에서 문자 문화의 다양성을 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 대표는 “필체를 보면 쓴 사람의 당시 감정과 인격이 드러나기 마련”이라며 “한글 손 글씨체가 풍부해지면 사람의 감정까지 함축해 전달할 수 있는 다양한 한글 글꼴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성 들여 손 글씨를 쓰는 행위가 두뇌를 자극해 집중력을 높이고 좋은 정서를 갖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도 손 글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여러 논리 중 하나다.

한글학회와 DX코리아가 2011년부터 매년 진행하는 ‘한글 손 글씨 공모전’도 활자 문화 발전을 위해 손 글씨를 풍성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행사다.

공모전에서 제시하는 좋은 손 글씨의 기준은 글꼴이 독창적이고 미적 감각을 갖추면서 균형과 조형미가 있고, 쉽게 읽혀야 한다는 것이다.

홍 대표는 “좋은 손 글씨란 무조건 예뻐야 한다기보다 정갈하고 읽기 쉬운 것이어야 한다”며 “그런 글씨체가 많이 소개되고 대중적으로 알려지면 한글 문자의 문화적 풍성함이 한층 더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손 글씨를 직업적으로 구사하는 ‘캘리그래퍼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는 아름다운 손 글씨체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스테디셀러 서한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표지부터 자신이 직접 쓴 글씨를 제목 디자인에 넣었다. 이후 ‘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 ‘강의’ 등의 저서에서 모두 자신이 직접 쓴 서예글씨를 표지 제목으로 사용했다.

소주 브랜드 ‘처음처럼’의 글씨체도 신 교수의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글씨체가 출판분야를 넘어 주류 등 소비재의 문화지형까지도 변화시키는 대표적인 사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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